강구대교 옆 강구파출소의 작은 주차장에서 보면 강구항 전체가 조망됩니다. 다리를 건너기 전에 ‘포토존’이라고 밝힌 안내판이 있으니 잠시 추억을 위해 사진을 남기는 것도 좋겠습니다. 2015년이 강구항 개항 100주년이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숫자가 중요하다는 것이 아니라 그만큼 깊은 역사 속에 많은 사연도 담겨 있다는 뜻입니다. 실제로 이렇게 아름다운 항구에 수탈의 역사가 담겨 있는 것은 물론, 강구대교에도 아픈 사연과 전쟁의 상흔이 남아있답니다.
강구대교에 어린 사연
제국주의 일본은 식민지 수탈에 열을 올리며 전국의 지하자원은 물론 농수산물에까지 눈을 돌리게 됩니다. 이곳 강구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일본인들이 이곳까지 몰려와 발달된 어로기술과 대형 어선으로 수자원을 무차별 남획한 것입니다. 그렇게 잡은 물고기를 대구나 서울로 운반하기 위해서는 육로를 이용해야 하는데 오십천 물길이 가로막아 쉽지가 않았습니다. 잡은 물고기 양이 워낙 많아 나룻배로는 버거웠던 것입니다. 그때 일제는 영덕읍 화개리의 북송정 우거진 노송에 눈을 돌리게 됩니다. 나룻배 대신 부교나 다리가 놓인다면 주민 역시 편리한 것은 사실이었습니다. 1922년, 결국 면장이 노송의 벌목을 허가함에 따라 이듬해 이쪽저쪽을 가로지르는 부교가 놓이게 됩니다. 그러나 당시의 기술로서는 아무리 튼튼하게 부교를 놓았더라도 자연재해 앞에서는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어서 장마나 태풍이 불면 애써 놓은 부교가 떠내려가기 일쑤였답니다. 그러나 가장 피해를 당한 것은 사람이 아니라 북송정 노송들이었습니다. 떠내려간 부교를 다시 만들기 위해선 또다시 노송을 베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결국 북송정의 노송을 베어오는 데도 한계가 찾아왔고 새로운 대책이 필요해졌습니다. 이에 강구에 거주하면서 고기를 남획하던 일본인과 지역 유지들이 조선총독부에 콘크리트 다리를 놓아주길 요청했습니다. 조선총독부에서는 마침내 경상북도에 예산확보를 지시합니다. 그리고 1936년 3월에 공사가 시작되어 1937년 8월 30일에 튼실한 콘크리트 다리가 준공됩니다. 튼튼한 강구대교가 완성되자 이제는 거칠 것이 없었습니다. 강구항은 동해안 중심의 풍족한 항구로 이름을 날리게 됩니다.
한국전쟁과 강구대교
1950년 6월, 동족상잔의 비극 한국전쟁이 터졌습니다. 강구대교는 파죽지세로 남하하던 북한군을 막아내며 방어선을 구축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됩니다. 국군 제3사단이 이곳 영덕에 최후의 방어선을 구축한 것입니다. 이후 금호리 뒷산을 중심으로 15일 동안 일진일퇴의 공방전이 20여 차례 벌어졌습니다.
당시 이 전투에 참여한 부대는 국군 제3사단을 비롯해 영덕경찰서 경찰부대와 강원도경 소속의 제1, 제2대대였는데, 영덕경찰부대와 강원도경 부대는 332고지 및 칠령 주변을 피로 물들이며 적의 공격을 용감하게 막아냈습니다. 그러나 막대한 피해를 당하고도 강력한 화력을 앞세운 북한군에게 강구를 점령당하게 됩니다. 당시 국군과 유엔군이 낙동강 방어선을 구축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무엇보다도 적의 보급로와 공격로를 차단하려면 다리 폭파가 최후의 수단이었습니다.
유엔군 미8군 사령관 워커 장군은 강구대교 폭파 책임자로 브리튼 소령을 지목하고 다리를 폭파할 시 제3사단장에게 승인을 받도록 했습니다. 이에 제3사단 공병대는 강구대교에 폭약을 설치하고 폭파 명령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결국 8월 8일, 제22연대장 강태민 중령이 폭파명령을 내립니다. 북한군의 기습에 더는 방어가 불가능하다는 판단을 내렸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다리의 폭발로 영덕을 탈환하였지만 강구는 북한군이 점령할 수밖에 없었답니다.
다음날인 10일, 국군은 다시 맹렬한 공격을 퍼부어 북한군을 강구 후방으로 격퇴시켰습니다. 하지만 북한군이 국군 제3사단 후방과 측면을 공격하는 바람에 제3사단은 고립되고 말았습니다. 결국 미8군 워커 중장의 도움을 얻어 해안으로 부대를 이동 시킨 후 배를 이용해 포항으로 철수했고, 철수한 제3사단은 최후 방어전선에 합류해 전투에 큰 도움을 주게 됩니다. 결국 영덕은 8월 17일부터 9월 24일 국군 제3사단 26연대가 남호동에 진출할 때까지 북한군 치하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당시 전투가 얼마나 치열했는지 폭격으로 고불봉의 높 이가 1m나 낮아졌다고들 한답니다. 이렇게 한국전쟁 중에 폭파된 강구대교는 1956년 1월 21일에서야 복구계획이 수립되어 재가설이 되었습니다. 오늘날 강
구대교는 여러 번의 보수를 거쳐 지금에 이르고 있지만, 붕괴 위험이 있어 대형차는 운행을 통제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 뒤로 다리가 새로이 건설되어서 강구로 드나들기가 더 편리해졌습니다.
역사의 숨결이 묻어 흐르는 강구항
오십천은 무려 40km를 내려오는 영덕의 젖줄입니다.
1900년대 초 당시 강구 어귀는 하구에 위치한 까닭에 구석구석에 늘 모래가 쌓여 있었고, 태풍이라도 부는 날이면 파도가 들이닥쳐 어선이 파괴되거나 사망자가 발생하곤 했습니다. 마침 1919년에도 거대한 태풍으로 대홍수가 일어나 오십천이 범람하고 파도가 몰아쳐 큰 피해를 가져오게 됩니다. 어구 주변에 있던 300여 호의 집이 물에 잠겼으며, 이 중 60여 호는 완전히 파괴되어 오갈 데 없는 이재민이 발생하였답니다. 사상자도 무려 50여 명 이상이 발생한 대참사였습니다. 그러자 강구항 공사에 힘이 실리게 됩니다. 마침내 ‘강구항축항준비위원회’가 결성되었고 공사는 1927년 2월 시작되오 1936년에 완공 되었습니다. 광복 후에도 많은 자본을 투입해 오늘날의 모습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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