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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포포와 태조 왕건
 

물가자미와 새천년 기념숲

 

오포리는 조선시대 초기부터 수군이 주둔하던 군사기지 ‘오포포’가 있었던 곳으로 기록에 많이 등장한다고 합니다. 당시로서는 대규모의 군사기지였다 하는데, 군함이 드나들던 곳은 7번 국도가 가로질러 지나고 있습니다.

블루로드는 오포리를 지나 강구파출소, 강구대교로 이어집니다. 오포해수욕장에 도착하면 넓게 펼쳐진 솔밭 앞으로 청정 바다에서 채취한 돌미역이 말라가는 모습이 가장 먼저 눈길을 붙잡습니다. 그 앞에 아주머니 몇이서 막 잡아 올린 물가자미를 분주히 손질하는 모습이 반갑습니다. 아주머니 손을 거치면 미끌미끌한 질감이 뽀얀 살결로 변하고, 목욕재계를 마친 물가자미는 망 위에 올려져 햇살에 말라갑니다. 갑자기 입에 군침이 돕니다.

분주함을 뒤로하고 소나무 숲으로 들어갑니다. 멀리 나무 사이로 하얀 모래와 파란 바다가 가늘게 놓여 어우러져 있습니다. 이 소나무 숲이 바로 ‘새천년 기념숲’이랍니다. 마을을 바람과 태풍, 파도로부터 보호하기 위하여 2000년 4월 오포3리 주민들이 모여 조성한 방패숲, 즉 해안방제림이지요. 솔향기 가득한 그 곳에 들어서면 시원한 그늘이 고마운데 모래땅에서 자라나는 해당화•와 외래종 노란 큰금계국이 작은 바람에 흔들리며 반기는 모습은 덤입니다. ‘이끄시는 대로, 온화, 미인의 잠결’ 등 해당화 꽃말은 세 개나 된답니다.

 

모래사장으로 향하면 한눈에 다 들어오지 않을 만큼 넓게 트인 바다 건너편에 강구항이 지척에 놓여 있습니다. 이제 강구대교를 향해 길을 잡습니다. 강구대교까지가 ‘쪽빛 파도의 길’이 끝나는 곳입니다.

 

괘방산

 

오포 3리에서 오포 2리, 오포포가 있던 곳을 지나면 고려 태조 왕건이 하룻밤을 묵었다는 괘방산이 있습니다. 높이 152m로 그리 높지 않지만, 모습이 마치 나비의 날개를 닮았다고 하여 ‘나비산’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던 것이 고려 태조 왕건이 경주를 향할 때 방문榜文을 내걸고 이 산에서 하루를 묵어갔다고 하여 괘방산掛榜山 또는 개방산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답니다.

 

후삼국 전쟁이 한창이었을 때의 일입니다. 왕건은 재암성 성주 선필善弼 장군의 도움을 받아 930년 1월 안동의 병산전투에서 후백제 군사와 싸워 승리합니다. 이 소식이 서라벌까지 전해지자 신라 마지막 왕 경순왕은 신라 내 친 고려파인 선필 장군을 통해 왕건에게 서라벌을 방문해 줄 것을 청합니다. 마침 강릉과 울산에 걸쳐 동해안 일대의 110여 개 주·군·현도 모두 선필 장군과 안동지역 성주들의 노력으로 왕건에게 항복하게 됩니다. 이렇게 경주로 가는 길이 확보되자 왕건은 931년 2월, 50여 명의 군사만으로 호위병을 삼아 경주 방문길에 올랐습니다. 고려 수군을 안동에서 강구항과 오포포로 보내 사전 준비를 마친 왕건은 영덕 영해를 거쳐 오후 2시경 영덕 회수리와 화천리에 걸쳐 있는 자부티로 출발하게 됩니다. 그런데 자부티 고개를 넘을 때 벌써 해가 뉘엿뉘엿 서산으로 넘어가고 있었으므로 왕건은 경주까지 가려면 무리가 있다고 판단하고 영덕에서 하룻밤을 묵기로 하였습니다. 만약을 대비해 강구항에 고려 수군을 배치해 놓고 있었기 때문에 큰 염려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 때 왕건이 하룻밤 묵었던 그곳이 바로 강구면 오포2리 괘방산, 일명 나부산(나비산) 밑이었습니다. 

 

영덕 막걸리 수헐愁歇

 

한낮이라곤 해도 2월의 영덕 날씨는 여전히 매서웠습니다. 하여 왕건은 부하들 의견에 따라 갑옷 속에 두꺼운 옷을 껴입고 자부티 재를 넘어가고 있었습니다. 늦은 점심으로 인한 식곤증 탓에 꾸벅꾸벅 졸면서 말이지요. 말고삐를 잡은 손에 조금씩 힘이 풀리며 왕건은 눈을 감았다가 뜨기를 반복하고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지체할 수만은 없었습니다. 신라 경순왕의 초대를 받고 떠나는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한편 고려의 왕건 장군이 이곳을 지나간다는 소문이 영덕에 파다하게 퍼졌습니다. 이는 화수리의 주등역酒登驛 책임자로 있던 역리驛吏 황씨黃氏의 귀에도 들어갔습니다. 왕건의 인물됨과 그의 강력한 군사에게 인근 고을이 모두 손을 들었다는 소식을 미리 들어 알고 있던 황씨는 왕건이란 인물이 무척 궁금해졌습니다. 그러는 사이 왕건이 막 영해를 지나 자부티 고개를 향했다는 소식이 바람에 실려 당도한 것입니다. 하지만 빈손으로 찾아가기에는 마음이 썩 내키지 않았던 황씨는 집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러고는 따사로운 햇살을 맞으며 툇마루에 걸터앉아 까무룩 졸고 있는 아내를 와락 소리를 질러 깨웁니다.

“아, 팔자가 늘어지게 좋구려! 지금 그렇게 병 걸린 닭 병아리처럼 졸고 있을 때가 아니오! 고려의 왕건 장군이 우리 고장을 지나고 있다니 내 얼른 찾아뵙고 인사를 올려야겠소.”

맛있게 낮잠을 즐기고 있던 황씨 아내는 화들짝 놀라 입가에 침을 닦으며 눈을 떴습니다.

“마누라! 정신 좀 차리고 내가 왕건 장군께 무얼 선물해야 할지 빨리 생각 좀 해보소.”

황씨 아내는 그제야 남편이 갑자기 왜 그러는지 이해가 되겠다는 표정으로 앞치마에 손을 천천히 비볐습니다. 그러고는 여전히 발을 굴리며 마당에 서 있는 남편을 향해 눈동자를 살짝 위로 굴리며 말했습니다.

“영감, 우리 집이 무에 그리 풍족해 장군께 드릴 물건이 남아 있겠소? 꼭 드리고 싶거들랑 작년 가을에 다져놓은 누룩으로 빚어 이제 막 익기 시작한 막걸리라도 한 사발 퍼가소. 그것으로 왕 머시기란 장군에게 따귀나 얻어맞지 마소.”

하며 옆마당 그늘에 놓여있는 옹기를 가리켰습니다. 황씨는 막걸리 소리에 침을 꼴깍 삼키며 생각했습니다. 딱히 떠오르는 것이 없으니 막걸리라도 대접하기로 말이지요.

황씨는 뒤안에서 지게를 가져와 아예 막걸리 단지를 통째로 짊어지고 집을 나섰습니다. 그리고는 허리춤을 추스르며 자부티 고개를 향해 열심히 걸어가기 시작했습니다.

얼마를 걸었을까? 황씨가 자부티 고개 정상에 막 다다를 즈음이었습니다. 저기 한 무리의 군사가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황씨는 그 중 가장 앞서서 말을 타고 오는 이가 왕건 장군이 틀림없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장군이란 사람이 내내 흔들거리는 것이 몸을 잘 가누지 못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럼에도 늠름한 모습은 어쩔 수 없었습니다. 황씨가 일행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그러자 군사 하나가 앞으로 뛰어나오더니 황씨를 막아서며 호통을 쳤습니다.

“웬 놈이냐? 감히 어디라고 앞을 가로막는 게냐?”

갑작스런 소란에 왕건이 눈을 뜨고 정신을 차렸습니다. 황씨는 겨우 정신을 수습한 후 천천히 지게를 내려놓고 왕건 앞에 엎드려 큰절을 올렸습니다. 가만히 지켜보던 왕건이 병사를 제지한 뒤 황씨를 향해 물었습니다.

“어디 사는 누구냐? 내게 무슨 볼일이 있어 나의 앞을 가로막느냐?”

목소리는 작고 다정했지만, 흐트러지지 않았고 힘이 있었습니다. 이에 황씨는 고개를 숙인 채 대답을 했답니다.

“장군님, 저는 요기 주등역에서 역리를 하면서 입에 밥풀칠이나 하는 황가라 하옵니다. 마침 장군께서 이곳을 지나신다기에 고명하신 장군님께 인사도 올릴 겸, 대접할 것이 없을까 생각하다가 저희 마누라가 담은 막걸리를 가져왔습니다. 비록 솜씨는 일천하지만 갈증과 피곤에는 이것만 한 것이 없사오니 송구하지만 이것으로 갈증을 푸시고, 군사들에게도 한잔 씩 돌려 힘을 얻게 하소서. 그리만 해주신다면 소인 평생 원이 없겠습니다.

 

 

막걸리 소리에 갑자기 갈증을 느낀 왕건은 말에서 내려 황씨에게 다가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 그래! 잘 되었구나! 아주 잘 되었어. 내 마침 갈증과 나른함에 겨우겨우 버티며 왔는데 이처럼 반가운 일이 어디 있겠느냐!”

그러고는 커다란 사발에 막걸리를 한가득 따라 벌컥벌컥 마시니 그간의 모든 갈증과 피곤함이 한 번에 사라지게 되었답니다. 함께 나누어 마신 부하들까지 막걸리 맛에 극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몇 잔을 더 마신 왕건이 껄껄 웃으며 말했습니다.

“이 술이야말로 천상의 맛이로다! 산해진미가 이에 따를 소냐? 세상 어느 술이 이 맛에 비할까? 이 한 잔의 술로써 동쪽 신라 사람들의 진심 어린 마음을 알았으니 서라벌에서 신라왕을 만날 근심은 이곳에서 모두 떨쳐버릴 것이로다!”

왕건은 황씨를 앞으로 오게 해 손을 잡고 말했습니다.

“가슴 속에 가득 차 있던 근심을 모두 풀어 주었으니 앞으로 너의 이름을 ‘나의 근심을 없애 주었다’는 뜻의 ‘수헐愁歇’이라고 하라!”

이렇게 역리 황씨는 수헐이라는 이름을 얻었고, 막걸리 이름까지 그렇게 불리었다고 합니다. 이후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하고 세월이 한참이 흐른 어느 날이었습니다. 주등역 역리 황씨가 개성의 왕건을 찾아가 증표를 보이니 왕건은 황씨를 반갑게 맞으며 큰 상을 내리고 자손 대대로 벼슬을 할 수 있도록 은택을 내려주었다고 합니다.

비록 막걸리라고는 하나 영덕의 막걸리 수헐은 근심을 없애주는 술이라 하여 영덕은 물론 인근 고을까지 각처로 팔려나갔답니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강구 막걸리 맛이 아주 빼어나다 합니다. 어느 이른 아침에 만난 초로 한 분이 극찬하며 마시던 그때가 떠올라 입맛을 다시게 됩니다.

 

오포리 골목길을 돌면 강구항을 오롯이 조망할 길이 잘 조성되어 있습니다. 계단을 올라 위에 서니 강구항 전경이 한눈에 들어옵니다. 강구 다리로 향하다 강구파출소 앞으로 난 건널목을 건넙니다. 그곳에 강구전통시장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부터 경상도는 장시활동이 전국에서 가장 활발했다고 합니다. 

이곳 강구시장 역시 그랬습니다. 3일과 8일에 열리는 오일장에서는 해산물은 물론 진기한 물건들과 왁자지껄한 시골장 풍경도 구경할 수 있답니다. 즉석에서 쪄주는 대게는 당연히 압권입니다. 두툼하게 썬 방어회와 갑오징어 회도 맛본 사람만이 그 진가를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니 욕심 부리지 말고 먹을 만큼만 적당히 구매해 배낭에 넣어 가다 경치 좋은 바닷가에 풀어놓고 즐긴다면 천상의 선인이 부럽지 않을 것입니다.

강구파출소 옆 강구대교를 향합니다. 그 너머 강구항이 반갑습니다. 이제 블루로드 A코스 ‘빛과 바람의 길’이 시작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