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사三思, 즉 세 번을 생각한다는 뜻입니다. 어떤 일을 행하기 전 충분히 신중을 기한다는 의미일 수도 있고, 삶의 고비에서 깊이 고뇌한다는 뜻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원래 조선시대 초기 삼사랑三士郞포라고 하였으며, 오늘날까지 삼시랑으로 부른답니다. 삼사리의 지명유래에 대해서는 몇 가지 전해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신라 혹은 고려시대에 시랑侍郞벼슬을 한 세 사람이 태어났다 하여 붙은 이름이라는 설과 이름 있는 선비 세 사람이 살았다 하여 만들어진 이름이라는 설입니다. 삼선랑이 사는 마을에서 삼선랑으로 줄여 불리다가 세월이 많이 흐르면서 삼시랑으로 변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현재 삼사해상공원이 들어선 자리는 지금도 좋은 곳이지만 예전에는 훨씬 더 빼어난 경치를 자랑하는 곳이었답니다. 영웅호걸이 호연지기를 키우기에 딱 알맞은 곳이란 뜻입니다. 신라의 유명한 화랑 삼선랑三仙郞이 강원도 고성의 삼일포에서 수련한 후 남으로 내려오다 이곳의 경치에 반해 머물며 수련하였기 때문에 ‘삼선랑’이 수련하던 곳이라는 의미가 새겨졌는데, 세월이 지나면서 ‘삼시랑’으로 변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한답니다. 그렇다면 당시의 사연을 자세하게 알아보겠습니다.
관동팔경을 돌아보고 삼일포에 ‘영랑도남석행永郞徒南石行’이란 글을 남긴 후 이곳까지 함께 내려온 남석랑南石郞, 영랑令郞, 술랑術郞은 이곳 재궁산이 수련하기에 딱 알맞은 곳이라 생각합니다. 높은 하늘과 파도처럼 밀려오는 산등성이, 그리고 흐르는 강물이 넓은 바다와 만나 신비로운 비경을 만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넋을 놓고 감탄하는 데 끝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이들은 바로 이곳 재궁산 꼭대기에 띠집을 짓고 수련에 들어갑니다. 그리고 틈틈이 지품골 대둔산에 은거하고 있던 전대前代의 화랑을 스승으로 모시고 세상 만물의 이치를 깨달아갔습니다. 간혹 삼사마을을 찾아가 어린아이들을 가르치거나 마을 어른들을 도와 궂은일도 도맡아 해서, 마을 사람들은 어떤 어려운 일이 닥치면 해결책을 물어오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세월이 흐르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지품의 스승이 백제와 조국 신라 사이에 전쟁의 기운이 있으니 어서 달려가 나라에 힘을 보태라고 합니다. 그러자 삼선랑은 서둘러 마을 사람들과 이별한 후 서라벌로 향했습니다.
삼국을 통일하고자 하는 원대한 꿈을 가지고 있던 태종무열왕과 김유신 장군은 백제를 공격하기 위해 황산벌로 향했습니다. 황산벌에 도착해 군영을 갖춘 김유신 장군은 함께 전장에 참여한 영랑, 술랑, 남석랑에게 특별한 명령을 내렸습니다. 삼선랑은 힘차게 대답하고 다른 화랑과 함께 말을 몰아 적진을 향해 질풍같이 돌진했습니다. 갑자기 공격을 받은 백제군영에는 일대 혼란이 일어났습니다. 신라군이 총공격한 것으로 오해한 나머지 우왕좌왕했던 것입니다. 세 화랑이 적을 향해 창검을 휘두르자 피가 하늘로 솟구치고 단말마의 비명이 황산벌에 울렸습니다. 높은 산 정상에서 이 모습을 지켜보던 김유신 장군이 마침내 명령을 내립니다.
김유신 장군의 명령에 따라 5만의 신라군사가 일시에 백제 진영을 향해 먼지 구름을 일으키며 돌진했습니다. 그러나 이 전투는 쉽게 끝나지 않았습니다. 계백 장군이 이끄는 결사대가 죽기를 각오하고 전투에 임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승리의 여신은 신라의 편을 들어주었고, 만고의 명장 계백 장군은 분노와 슬픔의 눈물을 황산벌에 뿌리며 죽었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최선봉에서 가장 큰 공을 세운 삼선랑은 나라의 동량으로 크게 이름이 나게 됩니다. 이후 668년 9월, 고구려와의 마지막 일전이 벌어진 평양성 전투에 참여해 다시 한 번 공을 세워 삼국통일의 대업에 마침표를 찍었습니다.
하여 그 전공을 높이 산 문무대왕이 이들에게 벼슬과 상을 내리고자 하였으나 이들은 한사코 사양하며 가족을 데리고 야성군 재궁산으로 돌아와 한가로이 한세상을 살았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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