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파제 너머로 넘실대는 바다를 바라보며 우뚝 솟은 맞배지붕의 전각이 보입니다. 구한말 망국의 한을 품은 채 스스로 바다로 걸어 들어가 목숨을 끊은 벽산 김도현 선생을 기리기 위한 곳입니다.
김도현 선생의 호는 벽산碧山이고 본은 김녕金寧입니다. 김홍집 등 친일내각이 들어서서 을미개혁을 단행하고 단발령을 내리자 선생은 조병희, 조영기와 더불어 영양 장날을 기해 향회鄕會를 열고, 안동부와 예안현에 나아가 그곳의 의병대장을 만나 숙의하고 돌아와 병사들을 규합한 후 왜적과 격전을 벌입니다.
그리고 1896년 정월 17일에 다시 향회를 개최하여 의병을 결속하였으며, 이때에 주왕산·청량산·일월산 등지에서 접전을 벌여 수많은 적을 사살하였고 공격해오는 적을 격퇴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2월 25일, 안동부로 진군하여 권세연의 안동의병진과 합류한 후 의병 활동을 전개하였습니다. 또한 안동의 김도화金道和 의병진과 연합하여 상주尙州 태봉胎峯에 주둔해 있던 왜군을 공격하여 큰 전과를 올렸으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병장기의 열세에 결국 패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그해 5월 10일 또다시 60여 명의 의병과 함께 강릉江陵에 진군, 강릉의병과 합세하여 혈전에 혈전을 거듭하니, 하늘은 핏빛으로 물들고 땅은 통곡으로 흔들렸습니다. 이에 선생은 눈물을 머금은 채 잔여병력을 이끌고 영양 일월산으로 퇴진하여 기회를 엿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당시의 정부가 안으로는 간신들이 판을 치고, 밖으로는 일본의 압력에 굴복함에 따라 결국 고종황제의 해산밀조를 접하여 10월 15일 부득이 의병들을 해산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1905년, 일본에 의해 을사강제늑약이 체결되었습니다.
그러던 1907년 봄, 선생은 왜군에게 잡혀 대구 달성옥에 6개월간 갇힌 몸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선생의 기개에 찬 모습에 옥졸들도 감히 모독하거나 거만하게 대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출옥 후 2년 뒤인 1910년 결국 경술국치를 당하자 선생은 치욕의 땅에서 더 이상 삶을 이어갈 이유가 사라졌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나 나이 드신 부친이 생존해있어 뜻을 결행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어렵게 흘러 1914년 7월이 되었습니다. 선생은 결국 부친상을 당하고야 맙니다.
슬픔으로 몸이 바짝 여윈 선생은 장례와 일 처리를 마친 후 다짐을 한 듯 부모의 묘소를 찾아 대성통곡한 후 걸어서 6일 만에 영해 땅 대진동大津洞에 이르렀습니다. 11월의 날씨는 매웠습니다. 바람이 불고 거친 파도가 몰아치고 있었으며, 선생의 뜻을 알기라도 하듯 하늘은 통한의 눈물인 듯 비를 뿌렸습니다. 선생은 7일 이른 아침에 대진의 북쪽 산수암汕水岩에 이르러 미리 준비한 유서 한통을 바위 위에 올려놓고 전국의 겨레에게 돌려가며 읽히라 하곤 동해 바닷가로 나아갔습니다. 그곳에서 상복을 벗고 신발을 벗은 뒤, 상중에 쓰는 대지팡이를 짚고 바다를 한참 바라보았습니다. 드디어 선생이 바다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나루터 주변의 사람들이 가슴을 움켜쥐고 선생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걸음을 옮기는 선생의 뒷모습은 어느 때보다 당당하고 굳건해 보였습니다. 멀리서 거친 파도가 몰아쳐왔지만 한 걸음 한 걸음 들어가는 선생을 막지는 못했습니다. 이제 선생은 사람들의 시야에서 한 점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잠시 뒤 완전히 사라졌답니다. 그때였습니다. 선생이 사라진 지점에서 한줄기 자색 기운이 산수암으로 뻗어 오르더니 오래도록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이때가 1914년 11월 초이레 동지일로 선생의 나이 향년 63세였습니다. 그렇게 혼연히 한 몸을 던져 오욕된 조국강산을 버리고 창해의 품속에 안긴 것이랍니다.
자신의 시신조차도 오욕스러운 식민지에 묻히기를 거부한 철인哲人이었습니다.
나라에서는 선생의 공적을 기려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습니다.
선생이 바위에 올려놓은 절명시는 이러하답니다.
오백년 왕조말에 나 어이 태어나서
붉고 붉은 의분의 피 끓어올라 가슴에 차는구나.
19년 동안을 헤매다 보니
머리털 희어져 서릿발이 되었네.
나라 잃고 흘린 피눈물 마르지도 않았는데
어버이마저 가시니 슬픈 마음 병들고 말았다.
홀로 고향 산에 우뚝 서서 아무리 생각해도
백가지 계책 중에 내 묘책이 가이없구나.
저 멀리 바닷길 보고파 했더니
7일 만에 햇살이 돋아오네
희고도 흰 천길만길 저 바다
내 한 몸 간직하기 넉넉하고 남겠네.
몇 줄의 시에 서릿발 같은 기개와 세월에도 씻기지 않은 한恨이 절절히 묻어 있습니다.
이제 벽산 선생을 뒤로하고 대진 해수욕장으로 향합니다. 바로 이곳 대진항에서 약 800m 걸어가면 대일회식당 맞은편 공터 입구에 블루로드 스탬프 찍는 곳이 있답니다. 잊지 마세요. 넓은 공터 뒤로 파란 바다가 시원하게 눈을 밝혀줄 것입니다. 아, 육각의 정자에 올라 잠시 망중한을 보내도 좋을 것입니다.
블루로드 외 음식 및 숙박시설 문의는 삼가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