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고려 중엽 때의 일이랍니다. 한양의 명문가 자손인 사남士南이라는 젊은이가 벼슬을 하는 숙부를 따라 이곳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숙부는 일을 마치고 돌아갔으나 젊은이는 이곳의 풍경에 반해 조금 더 머물다 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홀로 해변을 거닐며 일몰을 감상하다보니 어느새 해가 저물어 하룻밤 쉴 곳을 찾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산기슭에서 아리따운 처자가 물을 길어 들어가는 것을 확인하고 뒤따라갔습니다. 처자의 이름은 춘진春眞이었습니다. 사남은 춘진이가 들어간 집 앞의 사립문을 기웃거리며 주인을 불렀습니다.
조금 뒤 얼굴은 복숭아처럼 뽀얗고, 눈은 이슬처럼 맑아 마치 천상에서 막 내려온 선녀 같은 처자가 나왔고, 사남은 그만 첫눈에 반하고야 말았습니다. 사남이 얼굴을 붉히며 더듬더듬 말했습니다.
“소저, 내 이곳 풍경에 넋이 빠져 그만 해가 저무는 것도 몰랐소이다. 이곳에서 하룻밤 묵어갈 수 없겠소? 제발 부탁이오.”
그러자 춘진은 고개를 숙인 채 조용히 입을 열었습니다.
“이곳은 저 혼자 살아가는 곳입니다. 그러니 외간남자를 들여 묵게 할 수는 없습니다.”
당황한 사남이 처마 밑이라도 좋다며 거듭 간청하자 춘진은 어쩔 수 없이 하락하게 되었답니다. 그런데 사남이 여장을 풀고 막 잠자리에 들려고 하는 순간 어디선가 울음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울음소리를 찾아 밖으로 나온 사남의 눈에 구석진 곳에 쪼그려 앉아 울고 있는 춘진이 보였습니다. 사남이 물었습니다.
“무슨 사연이 있길래 그리 구슬피 우는 것이오?”
“얼마 전 왜구들이 쳐들어와 우리 부모님을 죽이고 가산을 약탈해 갔습니다.
저는 우물 속에 숨어 목숨은 건졌지만, 어머니 아버지 장례도 치러드리지 못한 불효막심한 자식이라 이렇게 눈물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사남은 아침 일찍 일어나 춘진 부모님의 장례를 서둘러 치러주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한양로 올라가기 전 얼굴을 붉히며 청혼하니 춘진이 답했습니다.
“내 어찌 선비님 은혜를 저버리겠습니까? 그러나 부모님 원수를 갚지 못하면 혼인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만약 저의 부모님 원수를 갚아 주신다면 당신께 시집갈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사남은 기뻐하며 반드시 부모님 원수를 갚아주고 그대와 혼인할 것이라 맹세한 후에 한양으로 돌아갔습니다.
한양으로 올라간 사남은 열심히 무예를 갈고 닦아 무과에 급제하였습니다.
그런 후 자원하여 이곳 축산만호로 부임하여 돌아왔습니다. 사남은 축산의 정세를 파악한 후 반가운 마음에 춘진에게 달려갔습니다. 그러나 춘진의 표정은 냉랭하기만 했습니다. 아직 부모님 원수를 갚지 않았다는 이유 때문이었답니다. 실망한 사남은 비통한 마음으로 바다로 걸어와 잠시 실신하고 말았습니다.
이때 왜구가 이 마을로 쳐들어왔습니다. 그중 세 놈이 춘진이 사는 집으로 가 춘진을 끌어냈습니다.
“이놈들아 우리 부모님을 죽이고 가산을 약탈하고도 모자라 나까지 잡아가느냐!”
날카로운 여자 목소리에 정신을 차린 사남은 곧바로 칼을 뽑아들고 비호같이 왜구에게 달려들었습니다. 춘진도 그냥 있지 않았습니다. 품속에 품고 있던 비수를 꺼내 왜구 가슴을 찌르자 그놈 역시 피를 흘리며 죽고 말았습니다. 이때 소식을 듣고 달려온 병사들과 합세한 사남은 마을을 돌며 노략질에 열중인 왜구들을 처단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한창 결전을 벌이던 중 왜구 한 놈이 사남의 등을 찌르고 말았습니다. 이 모습을 본 춘진이 달려들어 왜놈의 목을 찔렀으나 이미 사남은 피를 흘리며 쓰러진 후였습니다. 춘진이 사남을 품에 안고 흔들어 보았지만, 사남은 말 한마디 하지 못한 채 눈물만을 흘리며 춘진만을 바라보다가 스르르 눈을 감고 말았습니다. 춘진은 죽은 사남을 끌어안고 하늘을 향해 절규하다가 혼절하기를 몇 번이나 거듭했습니다. 이때 춘진이 얼마나 이를 갈았던지 이가 모두 빠지고 말았습니다. 이뿐만이 아니라 충격에 시력까지 잃고 말았습니다.
이런 춘진을 애석하게 여긴 마을 사람들은 사남을 정성 들여 장사지내주었답니다. 그리고 춘진의 절개에 감복해 그녀를 마을의 수호신으로 추앙하면서 보호해 주었습니다. 눈이 먼 춘진이는 마을을 다니며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몸을 사리지 않고 도와주었습니다. 그러면서 점점 세월이 흘러 춘진의 나이 70이 되어갈 무렵이었습니다. 어느 날 꿈속에 사남이 나타나 춘진의 손목을 잡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왔소.”
춘진이는 놀랍고 반가운 나머지 사남을 얼싸안고 울다가 함께 저승에 데려가 달라고 졸랐습니다.
“이승에서 못다 한 당신과의 인연을 저승에서 반드시 이루고 싶답니다. 부디 거절치 마시고 저를 당신이 사는 곳으로 데려가 주셔요.”
이 말에 잠시 고민하던 사남은 허락을 하였습니다. 춘진은 좋아라하며 사남을 따라나서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원구 마을을 지나 인량으로 가던 도중에 큰 내가 있었는데 앞을 보지 못하는 춘진이 사남에게 물을 건너게 해 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대답 대신 사남이 다가와 가시로 춘진의 눈을 찌르고는 홀로 가버리고 말았습니다. 춘진은 피눈물로 울다가 지쳐 원망의 목소리로 소리쳤습니다.
“나를 천생 과부로 만들더니, 이제는 앞도 보지 못하고 이가 없어 먹지도 못하는 나를 눈까지 찌르고 가시니 어찌 이럴 수가 있습니까?”
그러자 허공에서 사남의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내 죽어서도 당신을 잊지 못해 늘 걱정이었소. 그런데 한이 많은 내가 한을 풀지 못하니 동해의 팔령신八鈴神 중 하나의 악귀가 되지 않았겠소. 하여 꼼짝도 못하고 다만 벗어날 기회만 노리며 지냈다오. 그러던 중 동해의 마귀 괴수에게 심부름 갔다가 오는 길에 당신이 보고 싶어 찾아갔던 것인데, 당신이 함께 갈 것을 간청하므로 내 잠시 갈등하여 이곳까지 왔으나 당신이 악귀에게 당할 고초를 생각하니 차마 못 하겠구려! 하니 이곳에서 작별할까 하오. 그러나 만약에 내 부탁을 들어준다면 영원히 당신과 함께할 수 있을 것이오.”
그러자 춘진은 좋아하며 어떤 부탁이라도 들어주겠노라 약속하였습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이곳 영해부사 역동易東 우탁禹倬 선생이 영해 사록司錄으로는 요괴를 볼 수 있는 능력을 갖췄으니 그에게 고해 자신을 포함해 이곳을 어지럽히는 팔령신을 잡아다 동해에 수장시키면 이 고을이 평온해질 것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영해부사가 호령만 해도 요괴들은 꼼짝 못 할 것이니 그 기회를 틈타 사남은 탈출할 것이라 하였습니다. 춘진이 잠에서 깨어나니 눈앞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춘진은 참으로 기이한 꿈이라 생각하며 꿈에서 사남이 부탁한 대로 영해부사를 찾아갔습니다. 그러나 부사는 출타 중이라 자리에 없어 대신 반드시 전해달라며 아전에게 꿈에 있었던 이야기를 들려주었답니다.
그리고 얼마의 시간이 흐른 뒤였습니다. 도둑들이 모여 마을에 불을 놓고 물건을 훔쳐가자는 모의를 춘진이 엿듣고 부사에게 알려준 덕에 마을이 화를 면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앙심을 품은 도둑 중 한 놈이 춘진이를 죽이고 말았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이를 애석하게 여기고 마을 입구에 영신각을 짓고는 춘진이의 영혼을 모셔 마을을 지켜주는 동신으로 받들었답니다.
한편 영해부사 우탁은 평생 맹인으로 살아왔던 춘진이 눈을 떴다는 것에 그 이야기를 믿어보기로 하였습니다. 하여 춘진이 말한 대로 팔령신을 호령해 잡아 궤에 넣어서 바다에 수장하려고 가던 도중이었습니다. 때마침 춘진의 영혼을 모셔둔 당 앞을 지날 때 한 요괴가 빠져나와 이 당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고 합니다. 그러자 아전들은 칠령신만 수장하고는 부사에게는 모두 수장하였다고 고했습니다. 그런 덕분에 전생에 부부의 인연을 맺지 못했던 두 사람이 이 당에서 함께 살고 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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