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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8 영해독립만세의거
 

영해시장 골목을 나서면 모든 길의 교차점인 육六거리가 나타납니다. 그 한가운데에 만세운동을 기념하는 조형물이 우뚝 솟아 기상을 드높이고 있습니다. 힘없는 백성이 일으킨 망국의 절규이자, 항일의 표상으로 3월 18일 그날의 모습을 되새기고 있습니다.

 

영해만세의거는 기독교 장로파 전도사였던 김세영金世榮이 서울에서 3·1만세의거를 목격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평소 절친하던 전 구세군 참위 권태원權泰源을 만나면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권태원은 병곡면 송천리 송천교회 전도사인 정규하丁奎河(예수교 조사)와 유림儒林 측의 권상호權相浩, 남효직 등을 만나 다수의 동지를 규합하면서 영해장날을 기하여 만세운동을 일으킬 계획을 세웁니다. 권태원은 병곡면 송천리로 돌아와 정규하와 의논하여 태극기를 비밀리에 제작하는 등 만반의 준비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3월 18일 1시, 사람들이 많이 운집하는 영해장터에서 이들의 주도하에 첫 만세의거가 장날을 기해 일어났습니다. 처음에는 여느 만세운동처럼 비폭력, 무저항으로 조국의 독립을 요구하였으나, 점차 시위대가 늘어나면서 일제의 강압적인 해산방식에 격분한 군중의 분위기는 점차 험악해졌습니다. 영해읍내의 전 지역과 인근 병곡면에 이르기까지 만세시위의 행렬이 이어졌으며, 이 소식을 들은 창수면과 축산면에서도 잇달아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은 시내를 돌면서 만세운동에 비협조적이었던 영해공립보통학교, 영해면사무소, 영해우편소, 병곡경찰관주재소 등을 돌며 동참을 유도하거나 기물을 부수면서 행진을 이어가기 시작했습니다. 시위대가 점차 불어나자 진압부대가 투입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시위대는 한국인 순사

를 비롯한 순사 5명의 옷을 벗기고 칼과 총 4자루와 실탄 87발 등 무기를 빼앗았습니다. 시위대가 점차 폭력적으로 변하자 이들을 진압하기 위해 달려온 영덕경찰서장과 순사들은 도리어 화난 시위대에 의해 쫓기고 말았습니다. 이들은 축산면까지 도망쳤지만, 시위대가 붙잡아 무장해제 시키고 영해의 광본여관光本旅館에 감금하는 등 기세를 올리며 억눌린 민족감정을 폭발시켰습니다. 일제는 이를 해산시키고자 포항헌병대, 대구의 보병 18연대 병력을 동원하여 진압을 시도했습니다. 그리고 자국 일본인들을 보호하기 위해 강구항에 정박해 있던 일본어선 어부 60여 명과 일본인 재향군인, 일본인 소방대원을 동원해 시위 군중을 진압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무차별 발포가 시위대를 향했습니다. 앞장서 태극기를 흔들던 시위대 8명이 그 자리에서 즉사하고, 16명이 중경상을 입었습니다. 만세의거가 끝나자 수백 명에 이르는 애국지사가 체포되었습니다.

 

이 중에 159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실형 선고를 받았고, 이 외에도 수많은 사람이 일제의 군경과 식민기관에 잡혀가 고문과 구타를 당했다고 합니다.

3·18영해독립만세의거는 서슬 퍼런 일제의 무단식민통치하에서 힘없는 민중이 일으킨 망국의 한풀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운동에서 영해 사람들의 기상과 구국의 일념을 엿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