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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국 영령들의 정신이 살아 숨쉬는 장사해수욕장
 

 대게누리공원 앞으로 나 있는 7번 국도 아래 블루로드를 시작하는 지하도를 지나면 자그마한 어촌마을이 나옵니다. 블루로드를 걸으면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어촌마을입니다. 마을 회관 앞으로 난 길을 따라 걷다 보면 잔잔한 물결에 흔들리는 어선이 한적한 풍경을 선사하기도 합니다. 새벽부터 만선의 꿈을 안고 바다로 나갔다가 막 들어온 배는 한숨을 몰아쉬는 듯 보입니다. 방파제에 찰랑이는 파도 소리를 들으며 길을 걸으면 블루로드 스티커가 선명하게 반깁니다.

 

좁은 마을길을 따라서 걷습니다. 마을이 끝날 지점이면 7번 국도로 올라서서 바다를 굽어보며 걷게 됩니다. 급하게 달리는 차들 탓에 길가 끝을 찾아 걷습니다. 그것도 아주 잠시, 곧바로 넓은 바다를 낀 모래사장을 만날 수 있습니다. 이곳이 바로 장사해수욕장입니다. 큰 군함이 시선을 잡습니다. “이곳에 웬 군함?” 하실지 모르겠지만, 이 군함이 바로 동족상잔의 비극 한국전쟁 때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을 위해 북한군을 교란할 목적으로 실시했던 장사상륙작전을 기념하기 위해, 당시 상륙작전에 투입되었던 ‘문산호’를 재현해 놓은 것입니다. 이는 호국의 현장을 재현해 자라나는 후손들에게 지난날의 교훈을 들려주기 위해서랍니다.

 

그 뒤로 소나무 숲이 우거진 곳에 그날을 기리기 위한 기념비가 우뚝 솟아 있습니다. 겉으로는 아름다운 조형물이지만, 그곳에는 슬픔과 안타까움이 함께 묻어 있습니다. 

 

장사상륙작전

 

때는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채 두 달이 지나지 않은 어느 날이었습니다. 파죽지세로 낙동강까지 밀고 내려온 북한군을 맞아 우리 국군은 낙동강을 최후의 보루로 하여 방어망을 구축하고 한창 교전 중이었습니다. 대구에서 학도병을 모집한 국군은 대구 반야월에서 시민들 환송을 받으며 훈련소가 있는 밀양으로 출발했습니다.

 

대구에서 긴급히 모집된 이들은 밀양에서 31일까지 짧지만 혹독한 훈련을 견뎌냈습니다. 이후 장소를 육군본부청사가 있는 부산으로 옮겨 9월 11일까지 기본적인 유격교육을 추가로 받은 후 유격부대원으로서 부대에 편성됩니다. 이들은 모두 10대 청소년들로 학도병뿐만 아니라 피난민, 전쟁고아로 구성되었습니다. 총사령관 이명흠 소령을 비롯, 전술고문 전성호 대령과 참모장 백운봉 대위 등 현역군인 16명을 포함해 대구에서 지원한 병력 200명과 밀양에서 자원한 560명 등 모두 772명이었습니다. 독립 직할 제1 유격대대가 편성된 것입니다. 

부대는 편의상 정규사단 형태로 편제하고 유격부대 특성상 군번과 계급은 없이 임시계급만 부여했습니다. 그리고 네 개 유격연대에 약 180명의 인원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성동격서聲東擊西란 말이 있습니다. 바로 동쪽에서 소리를 내고 서쪽에서 적을 친다는 고사성어입니다. 즉 인천상륙작전과 함께 양동작전의 하나로 동해 영덕에서 장사상륙작전을 실행에 옮기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인천상륙작전이 전개되면 이곳에 주둔하고 있던 북한군이 합세하지 못하도록 그들을 발목을 묶어두는 것도 하나의 임무였습니다.

 

1950년 9월 13일, 이들은 당시 신성모 국방부장관과 정일권 육군참모총장이 배석한 가운데 육군본부 연병장에서 출정식을 가졌습니다. 이는 이틀 뒤에 전개될 인천상륙작전보다 앞서서 작전을 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어린 학도병들에게 지급된 것은 자신들 키만 한 소련제 장총 한 자루, 보급품 1kg, 밀가루 6봉이 전부였습니다. 오후 2시, 부산항에서 2,700톤급 LST(Landing Ship Tank, 상륙작전용 함정) 문산호를 타고 상륙지 영덕군 남정면 장사리 앞바다로 출발합니다. 당시 이곳 포항 형산강과 안강, 기계지역에서는 아군 제3사단과 김무정金武亭이 이끄는 북한군 제2군단이 치열한 공방전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이때 이들의 후방지역인 영덕군 남정면 장사리 지역은 북한군 제5사단 제101 치안연

대가 배치되어 해안경비와 점령지 치안을 담당하고 있었습니다.

 

작전 개시 첫날, 9월 14일 새벽 4시 30분, 장사리 해안에 도착한 유격대는 적의 경계가 소홀한 일출 전에 상륙작전을 완료하기로 하고 문산호를 해안 백사장으로 접안시키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해안 지형에 대한 사전 정보가 부족한데다, 불행하게도 태풍 ‘케지아’ 마저 몰아치고 있었습니다. 태풍의 영향으로 인한 높은 파도 때문에 문산호는 해안 접안에 성공하지 못한 채 수중 모래 턱에 좌초되어 정상적인 상륙작전이 불가능해지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북한군은 문산호를 향해 집중포화를 쏟아 붓기 시작했습니다. 좌초된 문산호에서는 바다에 빠져 익사하는 대원이 속출했습니다. 이에 유격대는 특공대를 뽑아 해안의 소나무를 긴 밧줄로 연결해 상륙을 시도했습니다. 악전고투 끝에 드디어 아름드

리 소나무와 문산호 사이에 밧줄이 연결되었습니다. 그리고 제28연대는 연대장 이영훈 중위의 전사를 비롯하여 수많은 사상자를 내고서야 상륙에 성공합니다. 

 

뒤를 이어 제29연대, 제37연대, 제32연대도 28연대의 엄호사격에 힘입어  차례로 상륙에 성공합니다. 이후 전열을 가다듬은 유격대가 해안에 흩어져 끝까지 저항하던 북한군을 섬멸하자 나머지 북한군은 200고지와 220고지로 달아나게 됩니다. 곧이어 해안에서 교두보를 확보한 유격대는 각각 세 방면에서 포위망을 좁히며 200고지를 공격하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완강하게 저항하던 북한군은 패색이 짙어지자 서남방으로 도주하기 시작했습니다.

 

9월 14일 오후 2시 50분경, 32연대가 200고지를 완전히 점령하였습니다. 이어서 제29연대도 봉황산을 점령해 해안 교두보를 확보하게 됩니다. 이곳에 지휘부를 설치한 유격대 사령부는 4개 연대에서 각각 2개 대대를 선발하여 장사리 일대에 산개해 있는 적의 포진지와 잔여 부대를 공격해 완전히 소탕하게 됩니다. 이로써 영덕으로부터 지원되는 북한군 주요 보급로가 완벽하게 차단되었습니다. 작전에 성공한 유격대의 사기는 하늘을 찌르는 반면, 적의 기세는 완전히 꺾였습니다.

 

한편, 아군 유격대가 장사리에 상륙해서 당시 포항지구에서 아군 제3사단과 접전을 벌이던 북한군 제2군단 5사단 후방을 공격함으로써 보급로를 차단하고 후방을 위협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고받은 북한군 제2군단장 김무정은 당황했습니다. 그는 유격대에 의해 차단된 보급로를 뚫기 위해 정예부대 2개 연대와 전차 4대를 차출하여 아군을 공격하기 위해 출발시켰습니다. 이로써 피아간 고지전이 벌어지게 된 것입니다.

유격대는 28연대와 32연대를 화진리와 뒷산 219고지에 전진 배치하여 적의 북상을 저지하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29연대를 구계리 뒤 봉황산까지 진출시켜 적의 보급로를 차단하며 적의 역습에 대비합니다.

 

작전 3일째, 9월 15일 맥아더 장군과 16개국 우방들이 참전한 인천상륙작전이 전개된 다음 날인 16일 오후 7시경 28, 32연대장으로부터 적의 대부대가 북상한다는 급보가 SCR 300 무전기를 타고 날라 왔습니다.

작전 개시 4일째, 9월 17일 새벽 5시경, 바다에는 전우가 흘린 핏빛인 양 붉은 여명이 밝아왔습니다. 이때 유격대 제32연대가 배치된 219고지 전면으로 적이 몰려오기 시작했습니다. 아군은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피아간 치열한 공방전이 오가고, 총알과 포탄이 비 오듯 쏟아졌습니다. 결국 40분간 교전 끝에 북한군을 물리칠 수 있었습니다. 아군의 피해도 적지 않았지만, 북한군 사상자는 더욱 컸습니다.

32연대를 돌파하지 못한 북한군은 방향을 바꾸어 125고지 28연대 전면으로 공격을 감행하기 시작했습니다. 전력을 다한 28연대는 모든 화력을 집중시켜 북한군을 남쪽으로 퇴각시키고 진지를 지키는 데 성공했습니다. 비록 상륙에 성공해 후방을 장악하고 적의 보급로를 차단하는가 하면 적의 공격도 격퇴하였지만, 아군 측 피해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상부와 연락할 SCR 694 장거리 무전기가 상륙작전 당시에 파괴되었고, 통신반장과 전술 고문이었던 전성호 대령과 LST 문산호 황재중 선장이 전사하여 더는 도움을 요청할 수 없는 거의 고립무원孤立無援에 빠지고 만 것이었습니다. 이에 이명흠 유격대장은 2명의 연락병을 선발해 상부에 보내 지원을 요청하는 한편, 17일 적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일몰을 기하여 전원 지휘부가 있는 200고지로 재이동 시키기에 이릅니다.

 

작전 5일째, 9월 18일 오전 7시 40분경, 북한군과 최후의 일전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적은 예상했던 대로 18일 오전 9시를 기하여 척후대를 앞세우고 유격대가 기다리고 있는 200고지 서남방 능선을 타고 고지를 향해 밀려왔습니다. 

그것을 안 유격대가 집중포화를 퍼붓자 적의 공격이 주춤했습니다. 그러나 유격대에게 총알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설상가상 식량도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이들의 작전 기간은 단 3일로 계획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더 이상의 접전은 전멸이라고 판단한 유격대는 해안선을 따라 육로를 통해 후퇴를 결정했습니다. 즉 북한군 점령지를 뚫고 남하하기로 결단을 내린 것입니다.

 

낮 12시 50분경, 전투를 중지하고 28, 29, 37, 32연대 순으로 도로를 따라 남하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약 3km를 이동하고 있었을 때, 하늘에서 헬리콥터 프로펠러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습니다. 다행히도 그것은 미 순양함에서 날아온 헬리콥터였습니다. 해안을 따라 가는 육상으로의 철수작전이 취소되었으니 19일 일출 전에 장사리 해안에서 해상으로 철수하라는 명령이 하달되었습니다. 유격대는 다시 장사리 방면으로 북상하게 됩니다.

남진하는 역순으로 32연대가 먼저 북상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200고지를 점령한 북한군이 북상하는 유격대를 저지하기 위해 고지를 내려오면서 양측 간 교전이 시작되었습니다. 방어에 성공한 유격대는 오후 6시 50분경, 장사리 해안의 좌초된 문산호 부근에 집결해 진지구축에 성공하고 철수준비를 서둘렀습니다.

 

작전 6일째, 9월 19일 오전 5시 15분경, 해상철수용 LST 함에서 미 해군 로버트 소령이 보트를 이용해 문산호에 올랐습니다. 높은 파도로 인하여 LST 함의 해안 접근이 불가능함에 따라 해안으로부터 약 200m 지점까지 접근하면 밧줄을 이용하여 철수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작전 개시는 일출 직전 오전 6시 30분에 어스름한 빛을 타고 시작하는 것으로 정했습니다.

9월 20일, 여명이 조금씩 세상을 밝히기 시작하자 작전에 따라 함포의 지원사격과 동시에 철수작전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높은 파도와 200고지로부터 쏟아지는 북한군의 맹렬한 포화로 아군의 피해가 속출하기 시작했습니다. 

철수 작전도 예상시간인 12시를 훨씬 넘긴 오후 3시가 넘도록 다하지 못하였습니다. 여전히 해안 진지에는 60여 명의 유격대원이 승선하지 못하고 대기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적이 쏜 박격포탄이 구출함 부근에 떨어지자 로버트 소령은 결단을 내립니다. 구출용 LST 함이 문산호처럼 될 것을 우려한 나머지 철수작전 종료를 명령하고 만 것입니다. 이때까지 약 30여 명의 유격대원이 해안 모래톱 위에서 빗발치는 적의 총탄 사이에서 승선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자신들을 태우고 갈 LST 함이 밧줄을 단 채 점점 멀어져가는 모습을 지켜 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육지에 남아있던 특공대원들은 전우들을 태운 배가 멀어지는 모습을 보며 눈물을 흘리며 손을 흔들었습니다. 그리고는 탈출이 불가능하리란 생각에 남은 30여 명과 함께 적진을 향해 돌진하였습니다. 유격대원들은 하나둘씩 스러져 갔습니다. 저 동해바다 멀리 유격대원들을 실은 LST 함이 점점 멀어지며 하나의 점으로 변했습니다. 파도는 언제 그런 일이 있었느냐는 듯 무심하게 밀려올 뿐이었습니다.

 

1950년 9월 14일 새벽부터 19일 오후 3시 30분경까지 6일 동안 장사리 일대에서 전개된 전투에서 육군본부 직할 독립 제1 유격대의 전과는 실로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적 제2군단 배후를 공격하여 적의 보급로를 차단함으로써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을 위해 실시한 교란작전이 성공했던 것입니다. 현재 생존해 있는 당시 유격대원들은 약 30여 명이며, 이들은 참전유격동지회를 결성해 당시 상황을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작전명 ‘174’, 원래 이 작전은 미8군에게 떨어진 것이었으나 우리의 젊은 학도병이 대신한 것입니다. 꽃을 채 피워보기도 전에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쳐야 했던 것입니다.

장사상륙작전은 그렇게 끝이 났습니다. 이들의 희생으로 대한민국은 다시 일어설 수 있었습니다. 이들이 흘린 피로 진정한 자유를 쟁취했던 것입니다. 부국강병을 이루어낸 뒤안길에는 이들의 숭고한 희생정신이 있었습니다.

1997년 3월 6일, 대한민국 해병대는 바다 깊숙이 펄 속에 가라앉아 있던 당시 상륙선 문산호를 인양하였습니다. 한국전쟁 당시 인천상륙작전을 가능케 했던 영덕 ‘장사상륙작전’의 상륙함이 살아온 것입니다. 그리고 영덕군은 이와 똑같은 크기와 형태로 복원한 문산호를 65년 만에 재현해 2015년 5월 22일 진수식을 가졌습니다. 길이 90m, 폭 30m로 복원한 2,000톤급 문산호에는 작전 전개 과정을 담은 컴퓨터 그래픽과 가상현실, 홀로그램 등 다양한 체험시설이 갖춰진다고 합니다. 그리고 영덕군은 내년 완공을 목표로 장사상륙작전 기념공원을 조성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