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은 이색 기념관
고려 말의 충신 목은 이색(1328∼1396)은 정치가이자 대학자로 영해면 괴시리에서 가정 이곡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이색 선생은 한 번 글을 읽으면 잊어버리는 일이 없었고, 1341년에는 열네 살의 나이로 성균시成均試에 합격하여 세상을 놀라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1353년에는 원나라에서도 과거에 급제하여 문명을 날렸습니다. 이후 고국에 돌아와서 대사성, 예문관대제학, 성균관대사성, 한산부원군으로 봉해졌으며, 유학의 중시조로 추앙을 받고 있습니다. 인문학의 원류대학자, 대사상가,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 등 그를 가리키는 수식어는 아주 많습니다. 그가 탄생한 이곳 외가이자 생가지에서 그의 생애와 사상의 깊은 흔적들을 가슴깊이 새겨봅니다.
그의 생애를 잠시 들여다보겠습니다. 아버지 이곡이 원나라 조정에서 중서사전부中瑞司典簿 벼슬에 오르자 이색은 조정 관원의 가족 신분으로 국자감國子監 생원生員에 임명되었습니다. 하지만 벼슬길에 나아간 지 3년이 지났을 때 아버지 이곡이 본국인 고려에서 죽자 선생은 급히 돌아와 상을 치렀습니다. 그리고 공민왕 원년(1352), 상중에 있으면서 전제田制개혁, 국방계획, 교육의 진흥, 타락한 불교 억제 등 당면한 여러 정책의 시정개혁에 관한 건의문을 올렸습니다.
이후 고려에서 여러 관직을 역임하다 향리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1375년(우왕 1) 왕의 요청으로 다시 벼슬에 나아가 정당문학政堂文學·판삼사사判三司事를 역임했고, 1377년에는 우왕禑王의 스승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1389년(공양왕 1) 이성계 일파의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으로 우왕이 강화로 쫓겨나자 조민수曺敏修와 함께 창왕昌王을 옹립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성계 일파 세력을 억제하기 위해 명나라 사신으로 가서 창왕의 입조와 고려에 대한 감시를 주청하였으나, 오히려 이성계 일파가 세력을 잡음에 따라 오사충吳思忠의 상소로 장단長湍, 함창으로 유배당하고 맙니다.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고 출사出仕를 종용했지만, 끝까지 고려의 신하임을 내세워 나가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1396년 여강으로 가던 도중에 죽었습니다.
시호는 문정文靖으로 생전에 성리학의 발전과 교육진흥에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이었습니다. 조선시대 성리학의 주류를 이룬 권근, 길재, 하륜, 정도전 등 수많은 제자들을 양성한 인물로도 유명합니다. 그리고 선생으로부터 포은 정몽주, 야은 길재, 김숙자, 김종직, 김굉필, 조광조로 성리학의 맥이 이어가게 됩니다. 선생의 문집으로는 〈목은유고〉, 〈목은시고〉가 있습니다.
발아래 ‘목은 이색 기념관’이 산 속 깊숙이 자리 잡았습니다. 선생이 태어난 괴시리 마을 뒷산 생가터에 지은 기념관입니다. 넓은 공간에 파란 잔디가 단정합니다. 팔작지붕의 기와집이 멀리서 반기고, 그 앞으로 조용히 미소를 머금고 앉아 있는 선생의 동상이 보입니다. 발걸음을 빨리해 다가갑니다.
기념관 옆 잔디밭에 ‘가정목은양선생유허비稼亭牧隱兩先生遺墟碑’가 무슨 이유에서인지 깨어진 채 옆으로 반듯하게 누워있습니다. 비석의 지붕돌만 온전한 것이 문득 서글픈 생각이 들었습니다. 머지않은 날에 다시 반듯하게 세워질 것임을 바라봅니다. 이곳에서는 격년제로 ‘목은 문화제’가 열린답니다. 이제 괴시리 전통마을로 향해갑니다.
괴시리 전통마을에 즐비한 고택
괴시리 마을의 유래는 고려 말에 중국 사신으로 다녀온 목은 이색 선생이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이곳 호지촌濠池村의 지형이 중국 장안성 괴시槐市와 흡사하다 하여 괴시라 하였답니다. 괴시1리는 괴시·호지마·호지촌·입천동 등 여러 이름으로 전해옵니다. 호지말은 옛날 마을 앞에 대략 8개의 못이 있어 그렇게 불렀다고 마을 사람들이 전해줍니다. 전통마을의 주택양식은 조선후기 영남지역 사대부가의 원형 그대로 계승하며, 문화와 예절 또한 함께 전승되고 있습니다. 마을의 핵심적인 위치에 자리한 영양남씨 괴시파 종택을 비롯해 대남댁, 영은고택, 물소와고택 및 서당 등 종택과 서당, 정자를 포함해 도합 14점의 국가 및 경상북도 지정 문화재 자료가 있어 문화재마을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이곳 출신 가운데는 신돌석 의병장을 적극 후원하는가 하면, 일제강점기 영해 3.18독립만세의거를 주동한 남계병을 비롯하여 남진두, 남효직, 남응하 등 항일 구국활동에 이바지한 독립투사들이 있습니다.
옛 마을 치고 이야기 하나쯤 전해 내려오는 곳이 없을까만, 이곳은 다른 마을과 달리 역사와 문화가 어우러져 더 풍부한 이야기를 품고 있습니다. 여느 시골마을 고샅길과 다름없이 한적하고 고요하지만, 이곳은 담장 하나 기왓장 하나에도 역사가 깃들어 있어 시간을 보내다 보면 역사를 거슬러 오르는 경험을 하게 될 것입니다.
전통마을을 감상하려 한다면 반드시 마을 입구에서 시작할 것을 권합니다.
그래야 종가의 위치와 사당과 서당, 고택이 들어선 입지 등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을 입구에 비각이 서 있습니다. 그 속 흑석에는 ‘가정목은양선생유허비稼亭牧隱兩先生遺墟碑’라는 글씨가 음각되어 청록색으로 칠해져 있습니다. 아마 생가터 잔디밭에 누워있던 것이 원래의 것이었는데 훗날 어떤 사연으로 인해 파손된 것을 잘 갈무리해놓고 이곳에는 후손들의 손길을 모아 새롭게 만들어 놓은 것 같습니다. 이곳 비각에서 마을 전체를 조망해 봅니다. 방금 걸어온 뒷산을 모산母山으로 하고, 앞으로는 송천강이 영해평야의 풍요를 끌어안으
며, 뒤로는 나지막한 안산案山이 편안한 것이 우리나라 자생적 풍수에 잘 접목해 들어선 마을임을 알 수 있습니다.
비각 뒤로 제법 넓은 터에 사각의 연못을 두고 그 속에 연蓮을 심어 여름이면 연붉고 흰 연꽃이 화려하게 피어나 사람들의 발길을 잡습니다. 연못을 앞에 두고 ‘괴정槐亭’이 있습니다. 원래 영조 42년(1766)에 건립되어 태남댁台南댁 또는 괴정고택으로도 불리는 이 고택은 괴정 남준형 공의 생가로 1911년에 새롭게 건립하였다 합니다.
깔끔하게 정돈된 길을 걸어서 발길 닫는 대로 걸어봅니다. 괴정 옆의 넓은 마당 뒤로 해촌고택이 멀찌감치 물러서 있습니다. 이곳은 해촌 남극만 공이 영조31년(1775)에 지은 집으로 고종 15년에 수리보수를 한 흔적이 있답니다.
정면 4칸, 측면 7칸의 안채와 사당으로 구성되어 있고, 안채는 정침과 아랫방, 중문, 큰 사랑과 작은 사랑으로 배치되어 있습니다. 그와 나란히 앞으로는 구계댁이, 뒤로는 태남댁이 놓였습니다.
구계댁 앞으로 서편에 물소와 서당이 나란히 서 있고, 그 옆으로 물소와 고택이 함께 놓였답니다. 물소와 남택만 공이 종가에서 분가한 후 그의 증손, 남유진이 150여년 전 건립한 고택으로 1864년 한 번 더 중수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연대가 정확치는 않으나 장여 밑에 ‘갑자 12월 27일 진시 상량’이라는 기록과 치목수법이나 보존 상태, 건축양식으로 미뤄볼 때 1924년 즈음해서 중수했던 것으로 보인답니다. 정면 5칸, 측면 6칸의 ‘ㅁ’자형으로 정침과 고방, 중문, 사랑 등으로 구성되어 있는 조선후기 주택양식의 전형적 건물이며, 남녀가 유별한 성리학적 삶의 이치에 맞게 사랑채와 안채 사이에 내부 담장을 두고 있는 모습은 처음 이 건물을 올릴 때 그대로일 것입니다.
물소와 고택 앞으로 천전댁, 주곡댁, 사곡댁이 단아한 모습으로 서 있고, 그 뒤로는 물소와서당이, 서당 옆으로는 영양남씨 괴시공파 종택이 나란히 안착해 있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가장 윗어른이 계시는 종택이 마을 가장 높은 곳, 즉 모산母山을 등지고 마을의 가장 중심에 좌정해 앞의 크고 작은 고택들을 바라보는 형국입니다. 물론 늘 공부하고 사색하며 후학을 양성하기 좋도록 서당과 종택이 가까이 위치해 있습니다. 이곳 종택은 17세기 말에 남붕익南鵬翼이 창건했다고 전합니다.
잠시 구조를 살펴보면 정침正寢 좌측 뒤로 사당祠堂이 놓여있습니다. 사대부가의 면모를 여실히 보여주는 곳이 바로 사당입니다. 사당은 종가의 가장 중요한 일인 봉제사를 모시기 위한 곳인데, 일반적으로 정침의 뒤쪽에서 왼편(동북쪽)으로 살짝 벗어난 곳에 있게 마련입니다. 종택 정침은 정면 8칸, 측면 5칸 반으로 다소 규모가 큰 집의 형태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특히 ‘ㅁ’자형의 안채 우측에 사랑채가 날개처럼 돌출해 조선 후기 남존여비의 사회적 격식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는 사랑채의 격을 한껏 높이기 위한 것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블루로드 외 음식 및 숙박시설 문의는 삼가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