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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은 이색 산책로
 

사진구름다리를 건너 목은 이색 산책로를 따라 길을 걸어갑니다. 처음에는 산능선을 따라 오르락내리락 하지만, 곧이어 내리막길만 나타나 발걸음을 가볍게 해준답니다. 오른쪽으론 동해가 펼쳐지고, 왼쪽으론 숲이 우거져 새소리와 바람소리를 들어가며 한적하게 걸어가는 참 편안한 길입니다. 목은 이색 기념관까지 약 70분 걸리는 3km 정도의 먼 거리입니다.

 

아카시아 전설

 

다리를 지나니 길의 초입부터 약간의 오르막내리막이 이어지면서 마음은 바람난 듯 살랑댑니다.

‘걷는 것은 자연의 속도로 살아가는 것’이라고 한 블루로드 슬로건이 어쩜 이리도 딱 맞아떨어지는지 모르겠습니다.

어디선가 익숙한 향기가 코끝을 스쳐갑니다. 아, 아카시아 꽃향기가 바람에 날려 이방인의 잔잔한 감수성을 헤집어 놓습니다. 먹거리가 귀했던 어린 시절에 참 많이도 따 먹었던 꽃입니다. 아카시아 꽃말이 참 이상합니다. ‘우정’, ‘숨겨진 사랑’, ‘희귀한 연애’라나? 희귀한 연애는 어떤 사연인지 사뭇 궁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 꽃말에는 사연이 숨어 있답니다. 할 줄 아는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이 아름다운 미모만을 가진 한 여인이 사랑을 쟁취하기 위해 마녀를 찾아가 자신의 미모를 팔고 대신 짝사랑하는 남자의 마음을 빼앗을 수 있는 향수와 맞바꿨습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남자(전설에는 시인으로 나옵니다)는 선천적으로 향기를 맡지 못했기에 여인은 미모만 버리고 향기 외에는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나무, 즉 아카시아 나무로 태어났다고 합니다. 그랬기에 아름다운 향기를 영원토록 우리에게 선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망망대해가 펼쳐지면서, 속세를 따라온 산이 더 깊고 푸릅니다. 산은 여전히 녹색의 파도를 치며 울렁울렁 따라오고, 푸른 바다가 늘 보던 것 같은 착각 속에 눈을 맑게 해줍니다. 이름 모를 새소리가 연주를 펼칩니다. 그것에 박자를 맞추듯 바람도 덩실덩실 춤을 춥니다. 그렇게 분주한 마음을 정리하며 세 길이 마주치는 곳에 왔습니다. 이곳이 망일봉이란 생각입니다. 넓은 바다가 저 멀리 조망되는 곳입니다.

 

망일봉과 주세붕

 

망일봉에는 주세붕 선생의 어린 시절 이야기가 전해옵니다. 어느 날 아버지 주문보周文輔가 지역 세도가의 미움을 사 모함을 받고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주세붕 선생은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세도가를 찾아가 항변했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주세붕은 아버지의 억울함을 풀어줄 수 있는 사람은 경상도 관찰사뿐이란 사실을 알고는 봇짐을 꾸려 길을 떠났습니다. 당시 경상도 감영은 상주에 있었습니다. 지금의 경남 마산 초입의 칠원이란 곳에서 상주까지의 길을 어린아이가 걸어간다는 것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습니다. 길에서 잠을 청하고 남의 집 처마에서 비를 피했습니다. 어떤 날은 후덕한 사람을 만나 밥을 얻어먹기도 했지만 대부분 며칠씩 굶기 일쑤였습니다. 그래도 그는 포기하지 않고 물어물어 상주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고는 경상도 감영을 찾아가 관찰사를 만나게 해달라고 졸랐습니다. 그러나 경상도 관찰사는 안동, 영덕 등 지역 순찰을 위해 떠나고 없었습니다.

 

주세붕은 그길로 돌아서 영해를 향해 다시 길을 걸어가기 시작했습니다. 상주에서 예천, 안동을 거쳐 영양을 지나 영해로 향했습니다. 가던 도중에 산적을 만나 죽을 고비도 당했지만 지혜롭게 넘겨가며 찾아갔습니다. 드디어 영해 주막거리에 피골이 상접한 채로 도착한 주세붕은 관찰사 일행의 움직임을 수소문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관찰사가 다음날 일찍이 망일봉에 오른다는 사실을 알아내고는 영해의 망일봉이 지척인 대진리에서 하룻밤을 묵으면서 새벽이 오기를 기다렸습니다. 주세붕이 밖을 내다보니 여전히 어둠이 깔려 있었습니다.

 

선선한 바람이 부는 봄날이라 밖은 무척 상쾌한 새벽이었답니다. 주세붕은 부랴부랴 옷을 걸치고 밖으로 나왔습니다. 그리곤 망일봉을 향해 산을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일찍 가서 관찰사를 기다릴 요량이었습니다. 그렇게 한참을 올라 드디어 망일봉에 올렀지만 바다에는 아직 해가 솟아날 기척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주세붕은 피곤한 몸에 잠까지 설쳤던 터라 정자 아래에서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습니다. 얼마를 그렇게 있던 중 갑자기 주위가 웅성거리기 시작했습니다.

 

화들짝 놀라 눈을 뜬 주세붕이 바다를 바라보니 붉은 기운이 뻗치고 깊숙한 곳에서 일출이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주세붕은 일출은 뒤로한 채 급하게 주위를 살피며 관찰사부터 찾았습니다. 그리고 관찰사 앞에 엎드렸습니다. 한참 기대에 찬 눈으로 바다를 바라보던 관찰사가 의아한 표정으로 주세붕을 내려다보았습니다.

“관찰사 어르신! 부디 저의 부친을 살려 주십시오!”

느닷없이 달려와 다짜고짜 부친을 살려 달라며 애원하는 주세붕을 본 관찰사는 비록 남루하기는 하나 예사롭지 않은 아이의 눈빛에 마음이 이끌렸습니다.

“네 감히 누구라고 나의 망일望日을 망치는가?”

“예, 저는 경상도 칠원땅에서 온 주세붕이라 합니다.”

“주세붕이라? 그런데 칠원이라면 함양 아래 작은 고을이 아니더냐? 그곳에서 나를 만나러 이곳까지 왔단 말이더냐? 그래 그럼 어디 그 사연이나 들어보자.”

그러자 주세붕은 관찰사에게 또박또박한 어조로 아버지의 억울한 사연에 대한 자초지종을 고했습니다. 그러자 관찰사는 그의 효심에 감복한 나머지 빙긋이 미소 띤 얼굴로 덧붙였습니다.

“그래, 그럼 내가 띄우는 운韻에 시를 짓는다면 너의 무례한 행동을 용서해 줄 뿐 아니라 부친의 무고함 또한 밝혀 보겠다.”

주세붕은 눈을 반짝이며 관찰사가 내는 운을 기다렸습니다.

관찰사가 처음 띄운 운은 어지러울 ‘분紛’자였습니다. 그러자 주세붕은 망설이지 않고 운에 답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어지러울 분紛, 고국소소낙엽분故國蕭蕭落葉紛 -고향에는 낙엽이 쓸쓸이 뒹굴겠지만 

해돋을 돈暾, 위봉일상간조돈危峰一上看朝暾 - 높은 봉우리에 올라 해돋이를 보니 

표表, 일화금동연천표日華金動連天表  금빛 햇무리는 하늘과 이어졌고 

뿌리 근根, 조향병굉할지근潮響兵轟割地根  수레바퀴처럼 밀려오는 파도는 지축을 쪼개네 

큰산 악嶽 , 상국흉관탄해악相國胸寬呑海嶽 - 상국의 도량은 산과 바다를 삼킬 넓지만 

곤坤, 서생안대소건곤書生眼大小乾坤  서생의 크게 뜬눈엔 천지가 작아 보이는데 

날개 핵翮, 약사양액생풍핵若使兩腋生風翮 - 만약 겨드랑이에 날개 생겨 있다면 

구름 운雲, 한만비등만장운汗漫飛騰萬丈雲  아득히 만장 구름 위로 날아 보려네

 

어린 주세붕이 막힘없이 척척 시를 지어 올리자 관찰사는 놀랐습니다. 시구에서 나타난 높은 기개에 감탄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참으로 좋은 시로다. 내가 매우 흡족하였으니 이제 너의 무례함을 용서하겠다. 그리고 내 돌아가 너의 부친의 무고를 밝혀 방면토록 할 것이다.”

이렇게 주세붕은 한 수의 시로 부친의 무죄를 얻었으며, 망일봉은 주세붕의 시 한 수로 주세봉이란 이름을 얻고 천하의 해맞이 명소가 되었습니다. 이 일이 있고서부터 억울한 일이 있는 사람이 망일봉에 오른 관찰사에게 하소연하면 반드시 명명백백 밝혀 주었다고 합니다.

 

뻐꾹채 이야기

 

이제 길은 왼편으로 굽어지며 속도를 냅니다. 바다와 이별하고 괴시리 전통마을로 향하는 길입니다. 아카시아 무리가 범벅이 되어 향기를 흩날리고, 그 아래 붉게 솟은 보랏빛 홍자색 꽃송이가 바람을 즐기고 있습니다. 자세히 보니 뻐꾹채라는 꽃입니다. 이 꽃은 엉겅퀴와 달리 가시가 없답니다. 다른 말로는 풀국채라고도 하는 이 꽃에는 매우 슬픈 전설이 숨어 있습니다.

먼 옛날 어머니를 일찍 여의고 계모 손에서 자란 소녀가 있었답니다. 계모는 매정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하여 툭하면 밥을 굶던 소녀는 너무나 배가 고픈 나머지 계모가 쑤어놓은 풀죽을 마셔버렸답니다. 그 바람에 소녀는 계모의 손에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세상 어디에도 갈 곳이 없었던 소녀는 어머니 산소에 찾아가 울다가 지쳐 쓰러져 죽고 말았습니다. 훗날 소녀가 죽은 자리에서 꽃이 피어났는데 그 꽃이 바로 뻐꾹채랍니다. 소녀가 풀죽을 마시고 계모에게서 쫓겨났다고 해서 풀국채라고도 한답니다. 그래선지 햇볕이 잘 드는 무덤가에서 잘 피어난다고 합니다.

 

식물도감에는 뻐꾸기가 날아와 노래하는 5월에 피는 꽃이라고 해서 그리 이름을 붙였다고 합니다. 또 어떤 이는 꽃봉오리에 붙은 비늘잎이 뻐꾸기 가슴에 난 털 색깔처럼 보인다고 해서 뻐꾹채라고 한답니다.

 

숲길이 참으로 편안합니다. 잡목이 우거진 아래 낭떠러지는 그 깊이를 알 수 없고, 깊숙이 숨겨뒀던 자연은 길이 되어 반기고 있습니다. 자연에 귀를 기울여 자연이 주는 음률을 감상하며 행복해 합니다. 길을 걸어가자 작은 정자가 나타납니다. 정자에 올라 아래를 굽어보니 영해평야 들판이 드넓습니다. 풍요로운 들판을 내려다보면서 가파른 내리막길을 걸어갑니다. 오른쪽 옆으로 목은 이색 기념관 안내간판이 나타나 길손을 인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