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으로 오르는 작은 오솔길입니다. 그리 가파르지 않아 편하게 오를 수 있습니다. 그 길을 따라 조금 올라가니 왼편에 비각이 놓였습니다. 그 속에 비석 두 기가 나란히 놓여 보호받고 있습니다. 남씨 시조 남민南敏 공의 후손이자 조선 후기 영의정을 지낸 남공철 선생이 쓴 비석 같습니다. 그 앞으로 안내문이 국한문 혼용으로 정리되어 있지만, 지금까지 축산항에 소개한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아 생략합니다.
소가 누워있는 형국의 와우산
비각 뒤로 평소 남민 공이 고향인 중국 여남에 대한 그리움으로 뜨는 달과 지는 해를 바라보며 사색에 잠겼었다는 월영대月影臺가 있고, 조금 더 올라가면 일광대日光臺 비석이 당시를 상상케 하고 있습니다. 고향을 그리는 망향단望鄕壇도 있습니다. 파란 하늘이 참으로 상쾌합니다. 바람이 불어와 이마에 몽글몽글 맺힌 땀을 시원하게 씻어 내립니다. 산 정상에 서자 와우산 너머로 새로운 바다가 보이고, 긴 의자가 몇 개 놓였습니다. 나무 그늘과 둥근 통나무로 계단을 만들어 편하게 오르내릴 수 있도록 친절을 베풀어 놓았습니다.
대소산 봉수대
이제 축산면과 영해면의 경계를 두고 봉수대로 향합니다. 해발 282m, 영덕 남동해안 주봉인 대소산의 동봉 정상에 놓인 바로 그 봉수대로 가는 길입니다.
산길로 대략 45분, 2km 거리랍니다. 가파른 언덕길이 계속되면서 숨이 차오릅니다. 잠시 땀을 훔치고 뒤를 돌아다보니 소나무 숲 사이로 축산항 전경이 나타납니다. 묵묵한 순례자를 자처하면서 걸어가노라니 이름 모를 야생화와 끝없는 깊이의 짙은 녹색, 파란 하늘을 닮은 새소리 등등 상상의 나래가 잠자는 감각을 일깨워 느림의 에너지를 선사해 줍니다.
화려함의 극치를 이룬 분홍빛 산철쭉이 무리를 지어 반깁니다. 산철쭉에 대한 이야기도 참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진달래는 사람들이 먹을 수 있다고 하여 ‘참꽃’이라 이름하는데, 철쭉은 불행하게도 독성이 있어 먹지 못하는 까닭에 ‘개꽃’이라 부른다니 철쭉의 입장에서 여간 억울한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도 너무 심했다 싶었는지 산지의 물가에 피어난다 하여 ‘수달래’란 듣기에 좋은 이름을 붙여 놓았답니다. ‘연달래’라고도 하는데 진달래에 이어 연이어 핀다는 뜻도 담겨 있으니 산철쭉으로는 그리 억울해할 일만은 아닌 듯합니다. 꽃말은 ‘사랑의 기쁨’, ‘사랑의 즐거움’, ‘희열’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산철쭉을 일러 한자로는 ‘척촉..’이라고 합니다. 머뭇거릴 척, 머뭇거릴 촉, 즉 이 꽃을 만나게 되면 누구라도 발걸음을 머뭇거리게 된다는 뜻이 아닐까 합니다. 다양한 이름을 만들어낸 우리 민족의 고운 심성을 엿볼 수 있습니다.
다시 산을 오릅니다. 그늘과 양지를 오가며 걷노라니 이마에서 땀방울이 아우성입니다. 숨이 가슴에 가득 찰 즈음에야 다시 약간의 평지와 그늘을 만나 땀을 훔치고 잠시 목을 축이며 쉬어 갑니다.
드디어 봉수대에 올랐습니다. 저기 먼 데를 바라다봅니다. 말간 하늘에 온전한 축산항 모습을 상상했는데 이방인을 시기라도 한 듯 왼쪽 산 계곡과 동해 넓은 바다에서 마치 요술을 부리듯 하얀 구름이 일어나더니 곧이어 바람을 타고 축산항을 향해 밀려옵니다. 드디어 흰 구름이 축산항을 뒤덮기 시작합니다. 하얀 구름이 항구를 에워싸자 햇빛조차 스러진 하늘은 구름을 타고 노니는 신선의 장난처럼 보입니다.
현재 봉수대는 조선 초기에 세워진 것으로 사각의 석축 위에 다시 둥근 석축으로 마무리했는데 불을 피워 연기를 올렸던 봉수대는 보이지 않습니다. 다만 옛날 터를 흔적으로 마무리했답니다. 언젠가 고증을 거쳐 온전한 봉수대의 모습이 완성되기를 기다려 봅니다. 정확한 사료를 찾기 어려우나 처음 이곳에 봉수대가 세워진 것은 최소한 고려시대 이전으로 본답니다. 이것은 조선조에 세워진 것으로 몇 번의 보수를 거쳤겠지요.
이곳 ‘대소산 봉수대大所山烽燧臺’는 동해안을 지키던 국토의 눈이었습니다. 고래불 앞과 창포리 앞바다에 이르는 해안을 지키던 축산만호의 관할 아래서 동해의 동향을 서울 남산(멱목산)까지 연결하는 감시소이자 통신기지였습니다. 남으로는 영덕읍 창포리 뒷산인 별반산의 봉수대와 연결되고, 북쪽으로는 울진군 후포리 광산廣山의 봉수대와 이어지며, 안동을 거쳐 마지막으로 고려시대에는 개성에, 조선시대에는 서울 남산까지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특히 왜구들의 노략질을 가장 먼저 이곳에서 확인하고 봉화를 올려 대비케 했던 것입니다. 봉수대는 넓은 시야를 확보함은 물론 상대 쪽에서도 명확히 확인할 수 있는 장소여야 하며, 밤에는 횃불로, 낮에는 연기로 신호를 주고받았습니다. 원래 봉화는 밤에 피우는 횃불만을 가리키는 말이었는데, 조선시대에 와서 낮에 올리는 연기까지 포함해 봉수라 통칭하게 되었답니다. 여기서 봉수란, 밤에 횃불로 알리는 봉烽과 낮에 연기로 알리는 수燧를 합친 말입니다.
봉수는 적의 출현 상황에 따라 횃불의 수로 나타냈습니다. 《경국대전》에 의하면 해상과 육상의 구별 없이 5개의 횃불을 사용하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비바람으로 연기와 불빛이 여의치 않을 때를 대비하여 즉시 다음 봉수대에 급보를 전할 수 있도록 봉수군이 늘 대기하고 있었습니다.
이곳 대소산 봉수대는 우리 지역을 포함한 동해안 일대에서 나라를 지키던 최일선의 감시소이자, 통신기지 역할을 하는 국토를 지키는 호국의 눈이었던 것입니다. 이제 이곳을 벗어나 1.5km 거리인 망월봉을 향해 발길을 옮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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