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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백산 호랑이 신돌석 장군
 

登樓遊子却忘行등루유자각망행 - 누에 오른 나그네 길을 잃고

可歎檀墟落木橫가탄단허낙목횡 - 낙목에 가로 놓인 단군의 터전을 한탄하노라.

男兒二七成何事남아이칠성하사 - 남아 27세에 이룬 일이 무엇인가

暫倚秋風感慨生잠의추풍감개생 - 문득 가을바람이 부니 감개만 이는구나.

 

위의 글은 신돌석 장군이 울진 월송정에서 세상을 탄하며 읊은 시詩입니다.

 

신돌석申乭錫의 집안은 7대조가 동지중추부사라는 높은 벼슬을 지낸 가문의 후예였음에도 불구하고 이후로 문맥文脈이 끊겨 거의 평민집안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나 신돌석은 태생의 한계나 신분의 제약에 굴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비록 평민으로 태어났으나 윗대로 고려의 개국을 도운 신숭겸 장군의 핏줄이 흐르고 있었기 때문에 자존감이 무척 높았습니다. 아버지 신석주는 아들 돌석이 13세가 되자 인근 진성이씨 가문의 퇴계학파 육이당六怡堂 이중립을 스승으로 모시게 하고 학문을 이어가게 했습니다. 이중립 역시 어린 돌석의 인물 됨됨이가 예사롭지 않음을 알아보고 양반가 자제들과 함께 공부하도록 허락을 했습니다. 당시 신분체계로 보아 상상도 할 수 없었던 파격적인 일이었습니다.

 

세상을 떠돌며 후일을 도모하다

 

그의 눈은 반짝였고 입술은 의지에 찬 듯 꼭 다물어 있었습니다. 떡 벌어진 어깨, 당당한 체구와 오척 육촌의 큰 키는 더욱 힘차게 느껴졌으며 검붉은 피부는 새벽이슬에 맑고 투명하게 보였습니다. 산에서 내려온 돌석은 축산면 도곡리 일명 복디미 마을 구석진 곳의 집으로 조용히 찾아들었습니다. 그리고는 마당을 거쳐 불이 희미하게 켜진 사랑방으로 향했습니다. 진작부터 일어나 앞날을 걱정하던 아버지를 만나 뵙기 위함이었습니다. 새벽공기는 침묵에 휩싸였고 여명이 밝아오기 전의 서늘한 기운이 몸을 감싸며 휘돌았습니다. 사랑방 앞에서 기척을 하자 안에서 아버지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어서 들어오지 않고 무엇 하는 것이냐?”

돌석은 조용히 방문을 열고 들어가 아버지께 큰절을 올리고 그 앞에 꿇어앉았습니다. 그러자 아버지는 조용히 아들의 얼굴을 바라다보았습니다. 입을 먼저 뗀 것은 돌석이었습니다.

“불효자 이 몸, 아버지 어머니를 떠나 세상을 떠돌며 못다 한 인생 공부를 해볼까 합니다. 사람을 사귐에 있어 진실과 정성을 다하고, 세상의 새로운 문물과 병법을 익히다 보면 반드시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칠 날이 올 것이라 생각합니다. 부디 허락하여 주십시오.”

아버지는 고개를 들어 허공에 눈물을 감추고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말했습니다.

“그것이 네가 갈 길이란 사실을 깨달았다면 무엇을 망설이는 것이냐? 당장 떠 나라. 부디 어디를 가더라도 너의 몸속에는 장절공壯節公의 피가 흐른다는 사실을 한시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돌석은 기뻐하며 일어나 하직인사를 올렸습니다. 신석주는 장롱 속에 깊이 감추어 두었던 묵직한 엽전꾸러미를 넣은 보자기를 아들 손에 쥐어주었습니다.

돌석은 아버지께 큰절을 올리고는 밖으로 나왔습니다. 마침 조금씩 여명이 타오르고 있었습니다. 마치 돌석의 가슴에 붉은 기운이 솟아나듯 말입니다. 돌석은 안방 어머니를 향해 조용히 절을 올리고 돌아섰습니다. 대문을 나선 돌석의 발걸음이 매우 빨라지는가 싶더니 골목길에서 멀리 사라졌습니다.

그렇게 집을 떠난 신돌석은 강원도를 거쳐 충청도까지 전국을 주유하며 벗을 사귀고 뜻 맞는 이들을 만나 국권 회복을 위해 이들을 규합하는가 하면, 참된 스승을 만나 배움을 청합니다.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그의 족적을 자세하게 알 수는 없지만, 그가 세상을 떠돌며 보낸 10여 년의 세월이 항일 구국 의지를 다지는 기회가 되었음은 분명해 보입니다. 이때 문경의 이강년, 강원도 춘천의 민긍호, 경남 울산 출신의 박상진 등의 인물과도 두루 사귀면서 뒷날을 기약한 듯합니다.

 

구국의 기치를 드높이 세우다

 

전국을 주유하며 은인자중하던 그는 만 27살이 되던 해에 고향 영덕으로 돌아옵니다. 고향을 떠난 지 십여 년 만이었습니다. 아버지 신석주와 상봉한 돌석은 아버지와 마주 앉았습니다.

“아버님, 이제 제가 본격적으로 나설 때가 된 것 같습니다. 세상을 돌아다니며 온갖 것을 보아 왔지만, 힘이 없다면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아버님, 부디 제게 힘을 실어 주십시오.”

신석주는 허공을 쳐다보면서 한참 동안 말이 없었습니다. 얼마의 침묵이 흐르고 나서야 결심을 굳힌 듯 눈을 뜨고 아들 돌석을 내려다보며 말했습니다.

“장부 나이 그 정도면 세상의 이치를 깨달았을 터, 가산을 정리하고 자금을 마련하는 일이 시급하구나!”

돌석은 아버지 신석주의 뜻을 알아차리고 눈물로 엎드려 다짐하였습니다. 반드시 이 땅에서 일본군을 몰아낼 것이라고 말입니다.

이후 신석주는 약속대로 논과 밭을 정리해 군자금을 마련하였습니다. 이때 돌석은 평소 사귀던 각지의 열렬 의사들에게 의병 창의를 호소하는 통문을 보내 의병진을 구성하게 됩니다. 이 의병진에 농민·포수·천민들이 대거 참여했다고 합니다. 신돌석이 평민이었기에 평민 출신자들이 많이 합류하기는 했지만, 간혹 유림과 양반 출신들도 스스로 찾아와 함께 하기를 다짐하곤 하였습니다.

 

1906년 4월 6일, 축산 도곡리 마을 입구에 구국의 일념으로 모인 청년들이 순식간에 300여 명이나 몰려들어 대부대가 되었습니다. 신돌석이 자신들의 의진을 영릉의진이라고 칭한 것은 영해와 강릉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는 곧 동해안 일대 왜적을 단 한 놈도 발붙이지 못하게 할 것이라는 강한 의지였습니다. 신돌석이 먼저 군율을 정하고 직책을 분장한 후 진용을 갖추자 우국충정의 기세가 더없이 높았다고 합니다.

 

비호같은 사나이 신돌석

 

함께 모인 의병들은 함성을 치며 사기를 높여 전장을 향해 나아갔습니다. 신돌석 의병장은 군사를 훈련시키면서 영덕은 물론, 영해, 울진, 영양, 진보, 청송과 강원도 삼척, 강릉, 원주까지 활동 범위를 넓히는 한편, 일본 군인의 거주지, 일본 순사, 일본 선박 등을 중요 목표물로 삼아 일제히 공격해 타격을 가했습니다.

 

처음에는 영양 관아와 영양의 일본 무기고를 급습하였고, 이어서 청송군과 진보군, 울진군의 우편소를 공격하여 무기를 탈취하였으며, 1906년 말까지 평해군, 영덕읍성, 영양군 관아, 영해읍, 울진군 관아의 일본인 집단 거주지를 주요 공격대상으로 삼아 활약을 펼쳤습니다. 특히 그해 11월, 영양의 일월산, 지품의 대둔산, 포항과의 경계인 동대산을 근거지로 하여 동해안 일대를 신출귀몰 넘나들며 일본군을 공격하자 일본군은 전투가 벌어질 때마다 그의 지략과 전술과 용맹함에 벌벌 떨었습니다. 그의 이러한 활동 덕분에 일본인들은 신돌석 이름 석 자만 들어도 태백산의 비호飛虎같다며 오금이 저리곤 했습니다.

 

사기가 충만해진 신돌석 의병진은 울진의 일본군 전초기지를 공격하기도 하였습니다. 신돌석 장군과 의병부대가 으슥한 야밤을 이용해 몰래 침투하여 일본인 기지에 정박한 왜선倭船 9척을 침공해 불을 지르고 파괴하는 전과를 올린 것입니다. 그리고 삼척시 근덕면 장호동 전투에서 일본 군선을 침몰시키면서 태백산 호랑이라는 별명을 얻게 됩니다. 이러자 왜적은 신돌석을 체포하기 위해 혈안이 되었습니다.

 

특히 신돌석 의병부대는 군율이 엄하고 민폐를 끼침이 없어 가는 데마다 환대를 받았고, 혁혁한 성과를 이루어내는 데 있어 주민들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1907년이 되면서 그의 부대는 휘하에 3,000명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거대 의병진으로 커졌습니다. 당시 토벌에 실패한 일본 군경은 신돌석 의병진의 민활한 움직임에 대해 이렇게 평하였답니다.

 

“폭도는 소군小群으로 분산하여 은닉하고 있으므로 토벌대는 쉽게 수색단서를 얻지 못하고 행동지역 안의 각 촌락만을 면밀하게 수색하였다. 신돌석은 경찰대, 수비대, 헌병대에 의해 토벌당한 것이 그 수가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그는 실로 출몰이 자유자재하여 쉽게 체포할 수가 없다.”

 

회유와 협박

 

그러나 집요한 토벌작전으로 신돌석 의병진의 활동은 두드러지게 약화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설상가상 연합활동을 벌이던 삼남의진은 탄약과 무기가 바닥을 드러냄에 따라 다가오는 겨울을 대비할 여력조차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궁여지책으로 의병들을 소수로 나누어 유격활동을 벌일 계획을 세우게 됩니다.

그러나 이 역시 여의치 못하자 이듬해 봄에 강릉에서 다시 만날 계획을 세우고 의병부대를 해산하고 말았습니다.

신돌석 의병장의 활약으로 왜적들은 골머리를 앓았습니다. 끝내 토벌에 실패한 일본군은 그를 회유하기 위해 여러 공작을 펼쳤습니다. 도지사의 맹세盟誓와 일본 조선통감부 통감의 편지 등을 보내 귀순을 종용하였답니다. 영덕군 축산면 축산1리에서 태어나 신돌석 의병장과 결혼한 동갑내기 부인 한재여 여사를 협박해 신돌석을 회유하기도 했습니다. 이를 안 신돌석 의병장은 왜적의 눈을 피해 부인을 영양군 입암면 산골 마을에 거처를 옮겨 그곳에서 살도록 하였답니다. 이들 부부 사이에 있던 아들 경팔(1904년생)은 정확한 사인이 밝혀지지 않은 채 어린 나이에 숨을 거두었습니다. 일찍 아들을 잃은 신돌석 의병장은 동생 신태범의 아들 신병욱(1927년생)을 양자로 들여 한씨 부인과 함께 영양군 석보면 화매촌에서 살게 했다고 합니다.하지만 한씨 부인은 더는 남편을 만나지 못한 채 1952년에 사망하였다고 합니다.

 

한씨의 오빠인 한용수 역시 신돌석 의병진에서 활약을 펼치다 청송지구 전투에서 적의 총탄에 죽었습니다. 청주한씨 처가에서 신돌석 의진에 전답을 팔아 많은 군자금을 모아 지원한 사실을 안 일본군이 이들을 그냥 둘 리가 없었습니다. 이들이 얼마나 고초를 겪었을지는 말하지 않아도 상상이 됩니다.

 

신돌석 의병장 부친은 전재산을 의병활동에 모두 기척하였고, 가족들은 모두 뿔뿔이 흩어진 채 처가의 재산 또한 군자금으로 조달하였으며, 처남 역시 신돌석 의진에서 장렬히 전사하니 본가와 처가 모두가 독립운동가의 맥이 흐르는 가문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끝나는 것인가!

 

1908년 8월경이었습니다. 일본군 토벌대의 추격이 가까워오자 의병진의 세력 역시 급격하게 쇠약해졌습니다. 신돌석 의병장은 의병활동으로는 희생만 더 커지리라 판단하고 사실상 영릉의진을 해체하기에 이릅니다. 그리고 자신은 만주로 가서 그곳에서 저항을 계속하리라 마음먹고 새로운 계획을 세우던 중, 자신의 외가가 있는 지품면 눌곡리, 한때 자신의 휘하에서 의병활동을 하던 김상태, 상호, 상렬 형제를 찾아가 잠시 몸을 의탁합니다. 그러나 계략에 휘말려 그들이 돌아가면서 권한 독주를 마시고 술에 취하고 말았습니다. 이들 3형제는 이때를 놓치지 않고 떡메를 들어 신돌석의 머리를 사정없이 내리쳤습니다. 신돌석 의병장은 머리에 둔탁한 느낌이 닿는다는 순간 정신을 잃었으나 그러고도 200~300m를 뛰쳐나가 인근 개울에서 숨을 거두었습니다. 이날이 1908년 12월 12일(음력 11월 9일), 혹독한 추위가 기승을 부리던 때였습니다.

 

18세 어린 나이에 김하락 의병진에 처음 가담하였다가 27의 나이에 영릉의진을 창의해 왜놈을 벌벌 떨게 했던 신돌석 장군이었기에 2년 8개월, 약 33개월간의 대단한 활약 치고는 너무나도 허망한 죽음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짧은 의병활동 중에 탁월한 용맹술과 전술로 일본인의 간담을 서늘케 하고 대한제국의 기상을 드높였던 젊은 전사 신돌석 장군은 만 30세의 안타까운 나이로 세상에 이름만을 남기고 떠났습니다. 그것도 왜놈이 아닌 동족의 손에 의해 짧디 짧은 생을 마감한 것입니다. 피살 당시 보고서에는 김상호, 김상열, 김상태란 이름 대신에 김도룡金道龍, 김도윤金道潤이란 이름이 나온다고 합니다. 정황으로 미루어볼 때 후자가 본명일 가능성이 크다고 합니다.

 

신돌석 장군 생가터와 기념관 ‘충의사忠義祠’

 

늦어도 한참 늦은 감이 없지 않지만, 나라에서는 1962년 2월 1일에서야 신돌석 장군에게 건국공로훈장 복장을 추서하였습니다. 그리고 그의 유해를 국립묘지에 이장하여 후세의 본보기가 되게 하였습니다.

 

1995년, 영덕군 축산면 도곡리 528-1, 이곳은 스산한 흔적뿐이던 초가채의 생가가 드디어 복원되었습니다. 그리고 장군의 죽음 이후 100년이 지난 1999년에야 그를 추념하는 ‘신돌석 장군 유적지’가 조성되어 블루로드를 걷는 사람들의 발길을 이끌고 있습니다.

 

생가는 ‘一’자 형으로 정면 4칸, 측면 1칸 반의 초가채입니다. 아버지 신석주가 1850년 경에 지은 집으로, 1940년경에 일제 관헌들이 우리 민족 독립의 의지를 꺾기 위해 정략적 차원에서 생가에 불을 지른 바람에 상량주 및 연목 등 일부가 소실되었답니다. 그러나 1942년 경에 다시 보수가 되었고, 그 후 1995년 8월 19일 생가지 정비 공사를 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습니다.

 

그의 유적지는 장군의 혼을 모시는 충의사와 동재, 서재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충절정신을 체험할 수도 있다고 합니다. 풍전등화의 조국 현실을 개탄하여 스스로 의병을 일으켜 거센 일제의 탄압을 온몸으로 맞섰던 우국충정의 청년대장 신돌석. 어떠한 찬사도 그의 애국충정에 미치지 못할 것입니다. 다만 영덕에 부는 바람도, 바람에 흩날리는 복사꽃 한 잎에도 이들의 정신이 함께 담겨 있을 것이라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