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항구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축산항은 일제강점기 시절에 만들어졌습니다. 일찌감치 서구로부터 개항해 선진 어로기술을 전수받은 일본이 자국 연안의 어족자원을 마구잡이로 남획해 어자원의 씨가 마르게 되자 수탈의 대상이었던 우리나라로 눈을 돌린 것입니다. 이들의 약탈은 1914년과 1916년에 이르러 최절정에 달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들이 약탈한 어족자원을 부산이나 대구 등지로 실어 나르기 위해서는 당시 축산항의 규모가 작아 불편하기 그지없었습니다. 하여 더 크고 현대화된 항구가 필요했던 일본은 이곳 축산항을 개발하여 약탈자원의 운송을 위한 전진기지로 삼고자 합니다. 일본인 어부들은 조선총독부에 건의하여 도비 16,000원을 지원받아 항만 정비 공사를 시작하였고, 이때 시작된 공사로 인해 축산항은 항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뒤이어 남방파제 60m와 북방파제 50m를, 그리고 북쪽 방파제 90m를 연장하였습니다.
1911년 당시 축산항에는 부산, 원산, 웅기, 울릉도를 다니는 여객선이 정박했습니다. 조선대동환大東丸은 총독부의 명에 따라 월 4회 울릉도를 왕복하였는데 부산을 기항지로 포항을 거쳐 이곳 축산, 영해, 대진, 울진, 죽변을 지나 울릉도 도동에 닿도록 하였습니다. 식민통치와 동시에 자원의 약탈을 위해 곧바로 동해안의 울릉도 항로를 개척하여 정기여객선을 취항시켰던 것입니다. 울릉도 정기항로가 개발되자 이곳에는 울릉도 오징어잡이 배를 타기 위해 사람들이 몰려들어 인산인해를 이루었답니다. 그렇게 번 목돈으로 마누라 옷도 해 입히고, 아이들 공부도 시켰으며, 딸아이 시집도 보낼 수 있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울릉도에서 돌아올 때 울릉도 후박엿과 말린 오징어를 한 아름 안고 와 이웃에 나누어 주기도 했습니다. 후박나무 껍질을 넣어 약용으로 만들어 먹었던 그때 그 후박엿이 변해 울릉도 호박엿이 되었답니다. 정말로 울릉도에는 사라진 후박엿대신 호박엿이 지천입니다.
당시 정기적으로 운항하던 여객선이 언제 어떤 연유로 사라진 것인지는 자세하게 알 수 없지만, 태평양전쟁 당시 이 여객선을 군함으로 징발했던 것이 아닌가 추측해봅니다.
축산항은 작은 면 단위 항구라고 하기엔 매우 규모가 큽니다. 항구에 정박해 있는 크고 작은 배들이 이리저리 정겹고, 먼바다를 오가는 배들은 흰 물거품을 일으키며 분주합니다. 그리고 바로 이곳에서 축산의 명물 물가자미 축제가 열리는데, 축제 기간이 되면 인근 주민들은 물론 멀리서 찾아온 관광객들로 발 디딜 틈 없이 붐빈다고 합니다.
축산이란 이름은 주위의 산 생김새가 소가 누운 형국形局에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이 마을은 8세기 중기인 신라 경덕왕 때 청주한씨가 개척하였다고 전하나, 남씨 입향시조 유래로 더욱 유명하다고 합니다.
축산 또 하나의 명물, 물가자미
이곳은 물가자미가 특산물이라 할 만큼 풍부합니다. 뼈째 먹는 물가자미 회는 비타민 D가 풍부해 자라나는 아이들이나 골다공증 환자에게 특히 권장하고 있을 정도라고 합니다. 허준의 《동의보감》에는 성질이 순하다고 되어 있으며 어린이 성장발육에 도움이 된다고 합니다. 맛 역시 좋아서 일반 활어회만 알던 사람들이라면 담백하고 고소한 맛에 반할 것입니다.
물가자미는 4월에서 6월 사이에 통통하게 살이 올라 가장 맛있답니다. 그래서 ‘물가자미 축제’도 이때 열리곤 합니다. 벌써 8회째 열렸을 정도로 인기가 많은 축제라고 합니다.
물가자미가 축산항과 인연을 맺은 지는 무척 오래되었다고 합니다. 신라가 가장 번성했던 경덕왕 때부터 당나라 대對 일본 사신 안련사 김충
金忠(훗날 남민南敏 공으로 불리게 됨) 공과 관련이 있다고 합니다. 김충 공은 755년 늦은 봄 어느 날, 맏아들 석중錫中과 신하들을 거느리고 일본 사신으로 다녀오다 태풍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배에 실은 물과 식량은 파도에 휩쓸려 버렸고, 돛과 노조차 날려가고 말았습니다. 바람 부는 대로, 물결이 이는 대로, 그저 조류가 흐르는 대로 운명을 맡기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때 갑자기 갑판이 어수선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물고기를 잡아 근근이 명을 유지하고 있던 중 마침 물가자미가 무수히 잡혀 올라왔던 것입니다. 안련사는 직접 물가자미를 맛보고 극찬을 아끼지 않으며 이렇게 말했답니다.
“이게 무슨 고기인가? 이 고기의 생김새 역시 만국지도萬國地圖 해동海東의 땅 신라의 모습과 아주 닮았으니 이곳은 필시 신라 땅일 것이다. 예부터 해동에는 가 자미 같이 생겼다 하여 가자미 ‘접鰈鰈’자를 붙여 접역鰈域이라 하지 않았는가?”
그러자 옆에서 동행했던 아들이 말하기를,
“짠맛보다 시원한 맛이 아주 일품이라 할 만합니다.”
이렇게 하여 일행은 이 물가자미를 나누어 먹고 기운을 차렸습니다. 그리고는 마침내 바람이 삿갓 모양의 섬으로 불어주어 축산에 도달하게 되었습니다.
축산에 도착한 이들 일행을 주민들이 신기하게 쳐다보자 김충 공이 수행원들을 돌아보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앞으로 우리의 목숨을 건져준 이 물고기를 접역鰈域, 즉 신라땅에서 잡은 것이니 수접어라 부르도록 하라! 그리고 이 고기를 생각하며 늘 고맙게 여기고, 저기 남은 수접어는 이곳 백성들에게 모두 나누어 주도록 하라!”
물가자미를 한자로 수접어水鰈魚라고 쓴 것입니다.
그리고 목숨을 연명하게 해준 물가자미를 가지고 수행원 중 여필呂馝이란 사람이 천지신명께 제사를 올렸습니다. 그 이후부터 지금까지 물가자미는 축산 앞바다에서 늘 풍어를 이루게 되었답니다.
남씨발상지
축산항을 뒤로하고 정해진 길을 따라 걷습니다. 이제 ‘푸른 대게의 길’이 끝이 보입니다.
마을 뒤로 돌아가면 소가 누운 형상이라 이름 붙인 와우산 자락 아래 ‘남씨발상지’라는 커다란 대리석 비석이 서 있습니다. 남씨南氏 입향시조가 마을을 개척하여 살았던 곳이기 때문입니다. 앞 물가자미 편에서 잠시 언급한 것처럼 중국 당나라 봉양부鳳陽府 여남呂南의 김충金忠이란 사람이 이곳에 정착하면서 나라로부터 남씨 성을 받고 남민南民이 되었습니다. 당시 당나라 안렴사란 벼슬에 있으며 일본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오던 중 풍랑을 만나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지고 신라 경덕왕 14년(755)에 이곳 축산면 축산1리 죽도, 일명 축산도에 도착하였다가, 이곳의 후덕한 인심과 경치에 반해 신라에 살기를 청원하였습니다. 이에 경덕왕은 이들의 뜻을 받아들여 남쪽에서 왔다고 하여 남씨南氏 성을 내리고(혹은 중국 여남 땅에서 왔다고 하여 남씨 성을 내렸다고도 함), 이름을 민敏으로 고쳐 부르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시호를 영의英毅라 내리고 식읍食邑을 영양英陽으로 정하여 신라에서 살아가는 데 불편함이 없도록 보살펴 주었습니다. 남민 공은 이후 남씨의 시조가 되었으며, 뒤에 영양, 의령, 고성으로 분관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의 아들 복사공僕射公(휘諱, 석중錫中)은 영양김씨英陽金氏의 시조가 되었다고 합니다.
와우산으로 오르는 입구에 국무총리를 지낸 남덕우(1924~ 2013) 선생이 2005년 3월에 쓰고 남씨 대종회에서 세운 ‘남씨발상지南氏發祥地’ 대리석 비석이 우뚝 솟아 있습니다. 그리고 동신목 팽나무와 비석 사이의 작은 계단을 오르면 와우산이라 불리는 작은 동산이 나타나는데, 바로 그곳에 1800년 초에 후손 남공철南公轍(1760~1840)이 쓴 ‘당 안렴사 증시 영의 남공 유허비’란 비석이 서 있는 비각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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