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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산의 명물 죽도산!
 

축산면 소재지가 있는 축산항 죽도산에 오릅니다. 죽도산은 대나무가 우거진 산이라는 뜻입니다. 멀리서 바라보면 삼각형 뾰족한 산이 바다에 둥둥 떠 있습니다. 지금이야 육지로 변했지만, 이곳 죽도산이 ‘죽도竹島’라는 섬이었다는 사실을 영덕에 사는 사람도 잘 모르곤 합니다. 일제강점기 시절 일제의 필요에 의해 육지와 섬을 연결했던 것입니다.

 

최윤덕 장군, 아버지를 따라 왜구를 물리치다

 

죽도산은 고려말 충선왕 시절부터 본격적으로 노략질을 시작한 왜구들의 소굴이었습니다. 이후 공민왕恭愍王을 거쳐 우왕禑王 대에 이르러 절정에 달했다고 합니다. 그러던 1396년, 왜구들이 강원도를 노략질하고 내려오다가 이곳 축산항으로 들어와 약탈하려 할 때 최운해崔雲海 장군, 최윤덕崔潤德 부자가 이들을 섬멸했다고 합니다.

 

그는 무인으로서는 드물게 좌의정에까지 오른 인물입니다. 장군이 여진족을 토벌하고 북방을 개척하여 4군을 둔 일과 이종무 장군과 함께 대마도를 정벌한 일은 유명합니다.

 

장군의 나이 약관 20세, 아직 벼슬길에 오르기 전의 일입니다. 1396년, 아버지인 경상도 도절제사 양장공 최운해 장군은 부산의 동래성에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장군은 왜구가 강원도 평해성에 침입해 약탈과 노략질을 끝내고 이곳 경상도 영해부로 들어온다는 정보를 입수하자  참전 의지를 강력하게 밝힌 아들 최윤덕과 함께 휘하의 군사를 몰아 경주 안강과 포항 청하를 거쳐 이곳 달산면 달로산성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그해 11월 13일, 평해를 출발한 왜구들은 배를 정박시키기 좋은 죽도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최운해 부자는 무장한 군사들과 함께 축산면 도곡1리 반포反浦를 향해 말을 달렸습니다. 그러고는 축산천을 향해 툭 튀어나온 염장의 산 어귀에 군사를 매복시키고 왜구가 가까이 오기만을 기다렸습니다.

 

죽도에 배를 정박한 왜구들은 대담하게도 영해 읍성을 약탈하려는 목적으로 축산 도곡리를 거쳐 축산천을 따라 올라왔습니다. 최운해 장군은 아들에게 조용히 지시를 내립니다.

 

“저들 중 단 한 놈도 살아서 돌아가지 못하게 하라! 또한 우리의 용맹을 널리 알려 다시는 우리 강토를 침범하지 못하게 해야 할 것이다.”

 

아들 최윤덕은 비장한 어조로 대답했습니다.

“염려 마십시오, 아버님. 제가 앞장서서 그 위용을 보여드리겠습니다.”

그는 제1진으로 궁수부대를 앞세워 매복해 두었습니다. 그리고 도망치거나 숨는 왜구를 도륙하기 위해 창과 칼로 무장한 군사들을 뒤에 배치했습니다. 아무런 낌새를 알아차리지 못한 왜구들은 걸음을 빨리하며 우리 군사가 매복한 곳으로 가까이 접근해 들어왔습니다. 매복한 곳으로 왜구들이 모두 들어온 것을 확인한 최윤덕이 벌떡 일어나 외쳤습니다.

“공격하라! 화살을 퍼부어라! 단 한 놈도 살아서 돌아가지 못하게 하라.”

그 소리에 맞춰 화살부대가 왜구들을 향해 일제히 화살을 퍼붓기 시작했습니다. 순식간에 당한 일에 크게 놀란 왜구들은 피할 겨를도 없이 화살받이가 되고 말았습니다. 뒤로 도망치려 던 왜구들도 매복해 있던 우리 군사들이 달려들어 칼과 창을 휘두르자 전의를 상실한 채 목이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4,5백 명에 이르는 왜구들이 목숨을 잃었고 겨우 몇 명만이 살아서 도망쳤습니다. 관군의 대승이었습니다. 이날의 전투를 두고 사람들은 반포대첩이라 하였습니다.

 

당시 싸움이 얼마나 치열했던지 후세의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였답니다.

“죽은 왜구의 시체에서 흐른 핏물이 도곡리 앞과 염장들을 빨갛게 물들였다.”

반포대첩 이후로 다시는 왜구의 침입이 없었다는 것은 당시의 이야기를 뒷받침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최운해의 아들 최윤덕 장군은 양촌 권근에게 학문을 배워 태조 3년(1394)에 회시會試에 급제하였습니다. 이후 이곳 축산에서 왜구를 크게 물리친 공으로 정종 2년(1400)에 훈련원 부사직에 제수되었다가 이후 절제사, 우군총제右軍摠制에 올랐습니다. 그리고 의정부 참찬參贊으로 삼군도절제사三軍都節制使가 되어 체찰사 이종무와 함께 출병 15일 만에 대마도를 정벌하였습니다. 그러한 공적에 따라 공조판서, 평안도절제사, 삼도도순무사를 역임하면서 국방에 온 힘을 기울였습니다. 세종 15년(1433)에는 북벌을 총지휘하여 여진족을 토벌하고 북방을 튼튼히 한 후에 사직소를 올렸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답니다. 오히려 무신武臣으로서는 드물게 우의정에 제수되고, 1435년에는 좌의정에까지 올랐으며, 이듬해에는 영중추원사領中樞院使로 전임이 됩니다.

 

왜구들의 소굴, 죽도

 

축산항의 죽도산은 당시 육지와는 거리가 상당히 떨어진 섬이었습니다. 자연히 침입한 왜구들은 이곳을 배를 정박하는 첫 번째 장소로 삼았습니다. 왜구들은 창수면의 창수리 서읍령을 넘어 안동을 지나 강원도 철원 등지까지 올라가 약탈을 일삼았습니다. 나라에서는 이들 왜구 때문에 근심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결국 나라에서 윤가관(미상~1387년, 우왕13) 장군을 파견해 약탈과 살인을 저지르는 왜구들을 토벌케 하였습니다.

 

윤가관 장군은 이곳에서 노략질을 일삼던 왜구들을 소탕하고는, 다시는 왜구들이 발을 붙이지 못하도록 축산성을 쌓고 축산도병선도관령이란 관리를 두어 왜구들의 침입을 막도록 하였습니다. 그리고 절을 세워 아침저녁으로 예불을 올리게 함으로써 불심으로 왜구들을 물리치고자 하였습니다. 동시에 많은 승려를 상주케 하면서 바다로부터 침입하는 왜구들의 동정을 살피는 파수꾼 역할을 하도록 하였답니다. 바로 그 절이 ‘안해사’였다고 합니다. 아마도 왜구들의 침입에 대비도 하고 축산항 앞바다의 풍어를 기원하는 마음에서 이름을 그렇게 붙였을 것입니다.

 

죽도산에 장삼이 펄럭이면 태풍이 온다

 

남해 서해와 달리 동해는 흥해 칠포의 오도 외에 축산도가 유일한 섬이었습니다. 그런 까닭에 왜구들의 좋은 표적이 되곤 하였습니다. 당시 안해사 승려들은 바다와 국토를 지키는 파수꾼 역할을 해야 했습니다. 이런 승려들 덕분에 이곳 주민들은 안심하고 생업에 몰두할 수 있었답니다. 승려들 역시 그것이 주민을 위한 보시報施라 생각하며 최대한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사람들은 오랜 세월 늘 죽도산을 오르락내리락하는 승려를 보면서 살아온 터라 그 모습이 눈에 각인되었답니다. 특히 큰바람이 부는 날이면 승려들의 장삼이 심하게 흩날렸습니다.

 

호미곶에서 태풍이라도 올라오는 날에는 장삼의 너울춤이 더했습니다. 창포리나 노물리 주민들까지도 이 광경을 목격하곤 했습니다. 그들은 그 모습을 보고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스님 장삼이 저렇게 펄럭이는 것을 보니 태풍이 오려나 보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고 고기를 잡기 위해 먼 바다로 나갈지, 아니면 인근 근해에서 고기를 잡을지를 결정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먼 곳의 주민들은 장삼이 아니라 죽도산에 많이 자라고 있는 시누대(갈대의 일종)가 흔들리는 모습을 보며 추측을 했습니다. 승려들은 승려들대로 태풍이라도 부는 날이면 덩실덩실 춤을 추면서 산에서 내려왔다고 합니다. 왜구라도 감히 산더미 같은 파도를 뚫고 침입하기는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죽도산 전망대에 올라

 

잘 정돈된 나무계단을 통해 한 걸음 한 걸음 옮기다보면 전망대가 갑자기 눈앞으로 다가옵니다. 뒤를 돌아다보니 좌측의 블루로드 다리가 가까이에서 볼 때보다 더 멋스럽습니다. 조금은 숨이 차지만, 얼마 걷다 보면 벌써 전망대 앞에 와 있습니다. 기분 좋게 전망대에 오릅니다. 5층에 오르자 사방이 발아래 놓였습니다. 동쪽으로는 넓은 바다가, 서쪽으로는 말미산과 해안이, 북쪽으로는 축산항에서 대소산 봉수대, 대진리와 그 너머 고래불해수욕장이 선명합니다. 그리고 남쪽으로는 창포풍력발전단지가 한눈에 들어옵니다.

 

죽도산을 반대로 축산항을 향해 내려옵니다. 축산대게 활어타운을 거쳐 바다를 향한 작은 팔각의 누정에 올라 시원한 바람을 맞습니다. 해발 80m라고 얕보지 마십시오. 침략의 역사와 호국의 역사, 그리고 우리 고장 사람들의 애환이 오롯이 묻어 있는 산이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