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력발전단지를 벗어나 아래로 난 포장길을 걷습니다. 바다를 향해 서있는 ‘창포말등대’로 향하는 길입니다. 풍력발전단지 헬기장을 벗어나면 오른쪽 낮은 곳으로 가는 오솔길이 나타나는데 바로 창포리 마을로 향하는 길입니다. 영덕읍 창포리는 이 마을 갯가에 유난히 붓꽃이 많이 피어 ‘붓개’ 혹은 ‘창포’라고 하였답니다.
산길이지만 이 길 또한 한적함을 선사합니다. 그것도 잠시랍니다. 어느 순간 한 구비 돌아서면 바다가 눈앞에 짠, 하고 나타납니다. 이토록 시원한 풍경이 대체 얼마만이랍니까? 한달음에 달려가 바다를 향해 선 등대에 어깨를 나란히 둡니다. 갑자기 눈이 환해집니다. 새로운 풍경에 눈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모릅니다. 그런데 등대가 이상합니다. 일반적으로 보던 평범한 등대가 아닙니다. 등대 기둥을 대게의 집게발이 감싸고 빨간 윗부분을 받드는 듯 보입니다. 대게의 고장이라 그런지 역시 등대 하나에도 이 고장 영덕만의 독특한 모양으로 빼어난 멋을 부렸답니다. 위의 빨갛고 둥근 것이 해를 형상화한 것이랍니다. 바로 그 이름도 유명한 ‘창포말등대’입니다. 그 앞으로 뻥 뚫린 시선이 태평양 바다에 닿았습니다. 그 동안 저 멀리 바다 끝에서 불어온 바람이 어느새 이마에 부딪히더니 귓불을 살짝 건드리며 사라집니다. 쪽빛 바다가 파란 하늘과 어울려 가슴이 뚫린 듯합니다. 이 모습을 고스란히 가슴과 머리에 담아 둡니다. 하지만 아무리 눈을 크게 떠도 세상을 다 담지 못하는 것이 내심 불만으로 다가옵니다. 다만 하늘이 허락한 만큼 담아갈 뿐입니다. 한참을 그렇게 머물렀습니다. 저 멀리 구름과 어우러진 수평선을 보면서 도심에서 담아두었던 삶의 찌꺼기가 씻어지길 바랐답니다.
해맞이공원
해맞이공원으로 향합니다. 그 사이에 대게루미나리에공원이 있습니다. 이 공원을 일러 빛의 거리라고도 합니다. 밤에 바라보는 그 광경이 인공조명으로 인해 환상적인 모습을 연출하기 때문이랍니다. 알록달록한 조명이 가히 압권이라고 합니다.
차들이 달리는 포장길을 벗어나 대게루미나리에공원을 통과합니다. 그렇게 넋 놓고 걸어가노라면 곧바로 해맞이 공원이라는 커다란 비석을 만납니다. 그곳에서 일출을 상상하며 잠시 시간을 보내도 좋습니다.
여기까지가 블루로드 A코스 ‘빛과 바람의 길’이 끝나고 블로로드 B코스 ‘푸른 대게의 길’이 시작되는 시점입니다. 부산에서 울산, 포항을 거쳐 영덕을 지나 울진, 강릉으로 향하는 ‘해파랑길’ 중 영덕구간인 블루로드 반을 지나온 것입니다.
잠시 다리품을 쉬었다가 바다 쪽으로 내려가니 바위와 소나무, 파도가 어우러
진 새로운 길이 나타납니다.
일출
여기서 잠시 시간을 뛰어넘어 일출의 광경을 감상합니다. 창포말등대와 해맞이공원에서 일출을 감상하지 않는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하여 떠오르는 태양의 장엄한 모습을 감상하기 위해 다시 찾았습니다. 미래와 현재를 이어 붙여 블루로드를 레드로드로 잠시 분장해 봅니다.
두 번째 일출에 도전합니다. 지난번 뿌연 안개와 구름이 겹쳐 아쉬워했던 기억이 욕심 많은 내게 기어이 재도전을 부추겼답니다. 전날 내렸던 비로 인해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지만, 그래도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옛말을 떠올립니다.
어둑새벽 길 떠나는 나그네마냥 봇짐을 챙겨 밖으로 나오니 마침 비가 그쳤습니다. 다행히 바람이 불어 쌀쌀합니다. 이런 날씨가 일출을 감상하기에 딱 좋다고 합니다.
해가 떠오르기 전에 나타나는 노을 같은 햇귀가 세상에 퍼집니다. 하늘 먼 데서 반짝이며 빛나고 있던 달이 조금씩 힘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점점 하늘과 바다가 불타오릅니다. 알 수 없는 설렘으로 가득 차오르는 가슴을 도닥이며 동공을 크게 하고 앞을 응시합니다.
창포말등대 끝선에 역광의 일출이 비치면서 등대에 빨갛고 묘하니 네거티브한 선을 선사합니다. 태양이 바다와 하늘로 붉은 기운을 토해냅니다. 까만 창포말등대 역시 붉은 기운을 받아 조금씩 한몸이 됩니다. 모든 풍경이 가슴에 들어와 물이 듭니다. 높은 하늘은 암청색에서 조금씩 연해지다 시나브로 붉은색과 만납니다. 그사이 둥근 태양이 물 위에 떠 있습니다. 그리고 태양이 위로 오를수록 금빛 풍요로운 햇살이 바다로 내려와 세상을 적십니다.
문득 조선시대 여성으로서 처음 일출을 본 후 〈동명일기東溟日記〉를 남긴 의유당 남씨 부인을 떠올립니다. 우연한 기회에 읽었지만, 일출광경을 여성의 섬세한 필치로 표현한 문장에 무릎을 치며 감동했었습니다. 지적이며 참신하고 열정적인 어휘를 구사한 자유분방함이 돋보이는 것으로 평가된답니다. 한 구절만 소개합니다.
“붉은 기운이 명랑(밝고 환함)하여 첫 홍색을 헤앗고(헤치고), 천중天中(하늘 가운데)에 쟁반 같은 것이 수레바퀴 같하야 물속으로서 치밀어 받치듯이 올라붙으며, 항, 독 같은 기운이 스러지고, 처음 붉어 겉을 비추던 것은 모여 소혀처럼(소의 혀처럼) 드리워 물속에 풍덩 빠지는 듯싶으더라.”
블루로드 외 음식 및 숙박시설 문의는 삼가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