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발 235m의 고불봉은 영덕의 진산鎭山입니다. 고불古佛 맹사성孟思誠이 올랐다 하여 이름이 그리 붙었다고 합니다. 이후 이곳을 두고 수많은 시인 묵객이 찬탄하는 글을 지어 세상에 알렸습니다. 그 중에는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 (1587~1671)도 있습니다. 1638년 이곳 영덕으로 유배와 고불봉 아래 유배소를 정하고 약 8개월간 머물면서 20여 수의 주옥같은 시를 남겼지요. 고산 선생은 이곳 고불봉의 아름다움을 이렇게 찬하고 있답니다.
고불봉高不峰
봉명고불인개괴峰名高不人皆怪 - 고불이란 봉우리 이름이 이상하다 하지만
봉재제봉최특연峰在諸峰最特然 - 여러 봉우리 중 최고로 뛰어난 봉우리네
하용고고비운월何用孤高比雲月 - 어디에 쓰이려고 구름 달 사이로 높이 솟았나
용시유득독경천用時猶得獨擎天 - 때가 되면 홀로 하늘 받들 기둥이 될 것이네
우뚝 솟은 고불봉을 두고 가장 뛰어난 봉우리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곳에 서서 탁 트인 하늘과 바다, 발아래 굽어보는 맛에 감탄했던 것입니다. 또한 구름과 달의 절묘한 조화도 빠트리지 않았고, 종국에는 고불봉을 일러 하늘을 떠받드는 기둥이 될 것이라 찬탄합니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의병장 김하락
영덕읍내를 가로지르는 오십천을 내려다보며 호호대에 몸을 던져 스스로 목숨을 끊은 구한말 김하락 의병장을 떠올립니다. 경북 의성에서 태어난 그의 본명은 김길주金吉周이며, 명성왕후(훗날 고종이 대한제국으로 선포함에 따라 황후로 추증됨) 시해사건이 일어나고 단발령이 선포되자 의병을 일으킨 인물입니다.
김하락은 이천의진에 참여해 경기도 광주·경북 의성·경주를 거쳐 영덕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1896년 6월 29일, 이곳 영덕에 도착한 김하락 의병장은 영덕의진 100여 명과 영덕읍성 밖에 진을 구축하고 기세를 올리며 머물고 있었습니다. 이때 일본군의 화력으로 무장한 진위군과 일전이 벌어졌답니다. 처음에 의병진은 기습에 성공하여 기세를 올렸으나 부산에서 군함을 타고 강구항으로 입항한 진위군의 협공으로 전멸당하다시피 합니다. 때마침 비가 내려 의병진의 주력 무기인 화승총의 부싯돌에 불이 붙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김하락 의병장도 옆구리와 가슴에 2발의 총탄을 맞고 중상을 입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왜놈 앞잡이인 진위군에게 붙잡혀 욕을 당하느니 차라리 물고기 밥이 되겠노라!” 하면서 스스로 오십천에 몸을 던져 목숨을 끊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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