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래 영해부 읍내면 지역으로 바닷가가 되므로 한나리, 한날기 또는 대진이라 하였는데 대진이란 지명은 1469년에 발간된 「경상도속찬지리지」에 보이며, 1789년에 나온「호구총수」에도 그 이름이 보인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공수진과 건달동 일부 지역을 병합하여 대진동이라 하여 영해면에 편입하였으며, 1945년에 공수진을 대진 1동, 대진을 대진 2동, 건달을 대진 3동으로 분동하였다. 이후 1988년에 동을 리로 개칭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 그 북은 소리가 굉장히 커 춤을 추는 사람들 가운데에 두고 두드려가며 춤을 추었으며, 이렇게 시작된 춤이 바로 고려 향악무(鄕樂舞)의 하나인 무고(舞鼓)라는 춤이 되며, 춤 이름도 이 이야기로부터 만들어졌다.
◦ 이후 이혼 부사가 개경으로 올라가면서 이 춤은 궁중에까지 전파되어 궁중정재(宮中呈才) 중 향악정재(鄕樂呈才)의 하나로 자리 잡게 되었다.
◦ 이 춤은 화려하고 아름다워 현재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으며, 특히 국립국악원을 중심으로 자주 공연되고 있는 무용으로, 여덟 사람이 북 하나를 놓고 추되, 네 사람은 원무(元舞)라 하여 양 손에 북채를 들고 시종 북을 에워싸며 북을 어르거나 두드리며, 나머지 네 사람은 협무(挾舞)라 하여 삼지화(三枝花)라는 꽃방망이를 두 손에 들고, 가에서 방위(方位)를 짜고 돌거나 춤을 춘다. 이 춤에 쓰는 북은 교방고(敎坊鼓)를 약간 작게 만든 것으로, 세 기둥 위에 북통을 세로로 올려놓았다. 북통의 둘레는 청홍백흑으로 아름답게 그렸다.
◦ 현재 무고의 발상지 영덕군에서는 2000년에 ‘영덕무고예술단’을 창단해 군민들에게 무고를 전수시켜 무고 발상지로서의 정통 맥을 잇고 있다.
◦ 화산군 권근(權近)은 《동국사략》을 편찬하고 〈상대별곡〉을 작품으로 남긴 고려말 조선초의 문신이자 학자로서 문장에 뛰어난 성리학자였으며, 또한 영해에서 태어나 외가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던 목은 이색과는 사돈간이며, 고려 말인 1390년에 영해로 귀양 와서 영덕현의 〈객사기문(客舍記文)〉과 영해부의 〈서루기문(西樓記文)〉을 지었다. 특히 영해부의 〈서루기문〉에는 당시 영해부 지역민들의 생활상과 풍습에 대해 자세히 기록하고 있으며, 영해가 발상지인 궁중무용 무고(舞鼓)에 관해서도 자세히 소개되어 있다.
◦ 권근의 ‘서루기(西樓記) 중에서
◦ 영해(寧海)는 즉 옛날의 덕원(德原)이다. 산이 막히고 바다에 임하여 땅은 궁벽(窮僻)하고 깊숙하여 여름에는 서늘한 바람이 많고, 겨울에도 대단한 추위는 없다. 물고기와 자라와 전복과 조개 등 해산물의 생산이 많다.
◦ 옛날 태평하던 때에는 백성들은 풍성하고 송사(訟事)는 간단하여 집마다 거문고를 갖고 있어서 사람들은 줄을 고르는데 공교로왔다. 노래하는 목청과 춤추는 태도는 맑고도 예뻤고, 정사와 누대(樓臺)의 아름다운 경치는 거의 선경(仙境)과 같았다.
◦ 몽암(蒙庵) 시중(侍中) 이혼(李混)이 이 고을에 귀양왔을 때에 바다에 떠 있는 나무를 얻어서 춤추는 북을 만들고 그 절도(節度)를 가르치니, 그 소리는 굉장(宏壯)하고, 그 춤은 변전(變轉)하여, 쌍쌍이 펄펄 나는 나비가 봄을 재촉하는 것보다도 화기(和氣)가 있고, 날래고 사나운 용감한 기세는 두 마리의 용(龍)이 서로 다투어 적(敵)에게 달려갈 때보다도 힘차다. 이것이 영해부의 가장 크고 기이한 광경이어서 다른 고을에는 없는 것이다.
◦ 풍속을 살피며, 절월(節鉞)을 가진 인사(人士, 감사)들은 반드시 와서 유람하고 관찰하니 실로 한 방면의 아름답고 고운 땅이었다.
◦ 曰 寧海 卽古德原也 阻山濱海地僻而隩 夏多凉風 冬無涸陰 魚鱉蝮蛤海錯攸産 在昔盛時 民豐訟簡 家畜絲桐 人工繰縵 歌喉舞態 旣淸以婉 至於亭臺之勝 殆若仙境 及蒙庵李侍中混 謫宦而來 乃得海上浮槎 製爲舞鼓 敎其節度 其聲宏壯 其舞變轉翩翩然 雙蝶繞花 矯矯然 二龍爭珠 和於催春 健於赴敵 最府之一奇而 他郡之所未有 觀風杖節之士 必來遊觀 實一方佳麗之地也
◦ 푸른 동해바다의 거센 물결과 세찬 바람을 마주보며 대진항 바닷가에 세워져 있는 비석 하나 도해단(蹈海壇). 영양 출신의 유생 의병장으로 이곳에서 몸을 던져 순절한 벽산(碧山) 김도현(金道鉉 : 1852~1914) 장군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비석이다.
◦ 김도현 선생은 영양군 청기면에서 아버지 김성하(金性河)와 어머니 한양 조씨의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단종 복위를 꾀하다 순절한 김문기(金文起)의 후손으로 1894년 갑오농민군 진압을 빌미로 조선에 진출한 일본군이 친일 개화파 정권을 앞세워 정치, 사회, 경제 등에 걸쳐 탄압과 개혁을 시행하고, 명성황후의 시해사건, 단발령을 강제로 실시하는 것 등에 반대하고 일제의 침략에 저항하는 의병투쟁을 일으켰다.
◦ 선생은 1896년 청량산에서 제1차 의거한 이후 일본군과 수차례 접전을 벌였고,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강제 체결되자 영남의 선비와 상경, 을사조약반대 상소를 하고자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자결 순국하려고 하였으나 동지의 만류로 실패하고 귀향하였고, 1907년 정미의병 당시 이만도와 함께 제2차 의병을 일으켰으며, 1908년에는 영흥학교를 설립해 의병활동과 문화계몽 운동을 전개하다가 조선이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한 현실에 울분을 참지 못하고 순절을 결심해 1914년 아버지가 사망하자 장례를 마친 후 그 해 11월 영해 대진바닷가에 와서 유서와 절명시를 남기고 바다에 투신, 순절하여 지금까지 작은 비석의 모습으로 나라를 지키는 호국의 넋이 되어 푸르디푸른 동해바다를 바라보며 나라를 지키고 있다.
◦ 소설가 이문열씨는 허무와 절망을 이기지 못해 고뇌하고 방황하던 자신의 젊은 날, 자살을 위해 맨발인 채로 설화(雪花)가 만발한 창수령을 넘어 대진해수욕장에 다다른다.
◦ 이문열은 이 날의 기억을 평생 잊지 못하고 훗날 자신의 명저인 ‘젊은 날의 초상’을 통해 그 날의 기억들을 토해낸다.
◦ 이문열의 ‘젊은 날의 초상(肖像)’ 중에서
◦ 《창수령(蒼水嶺), 해발 7백 미터-》
◦ 아아, 나는 아름다움의 실체를 보았다. 창수령을 넘는 동안의 세시간을 나는 아마도 영원히 잊지 못하리라. 세계의 어떤 지방 어느 봉우리에서도 나는 지금의 감동을 다시 느끼지는 못하리라. 우리가 상정할 수 있는 완성된 아름다움이 있다면 그것을 나는 바로 거기서 보았다.
◦ 오, 그 아름다워서 위대하고 아름다워서 숭고하고 아름다워서 신성하던 그 모든 것들….
◦ 그 눈덮인 봉우리의 장려함, 푸르스름하게 그림자진 골짜기의 신비를 나는 잊지 못한다. 무겁게 쌓인 눈 때문에 가지가 찢겨버린 적송(적송), 그 처절한 아름다움을 나는 잊지 못한다. 눈 녹은 물로 햇살에 번쩍이던 참나무 줄기의 억세고 당당한 모습, 섬세한 가지 위에 핀 설화(雪華)로 면사포를 쓴 신부처럼 서 있던 낙엽송의 우아한 자태도 나는 잊지 못한다.
◦ 도전적이고 오만하던 노가주나무조차도 얼마나 자그마하고 겸손하게 서 있던가. 수줍은 물푸레줄기며 떡갈등걸을 검은 망사 가리개처럼 덮고 있던 계곡의 칡넝쿨, 다래넝쿨, 그리고 연약한 줄기끝만 겨우 눈 밖으로 나와 있던 진달래와 하얀 속새꽃의 가련한 아름다움.
◦ 수십년생의 싸리나무가 밀생한 등성이를 지날 때의 감격은 그대로 전율이었다. 희디흰 눈을 바탕으로 선잎진 싸리줄기의 검은 선(線), 누가 하양과 검정만으로 그 화려하면서도 천박하지 않고 고고하면서도 삭막하지 않은 아름다움을 보여 줄 수 있단 말인가.
◦ 하늘도 어느새 개어 태양은 그 어느 때보다 현란한 빛으로 그 모든 것을 비추고 있었다. 엷어서 오히려 맑고 깊던 그 겨울 하늘, 멀리 보이는 태백의 준령조차도, 일찍이 그들의 눈(雪)으로 유명했던 세계의 그 어떤 영봉(靈峰)보다 장엄하였다.
◦ 나는 산새도 그곳을 꺼리고, 불어오는 바람조차 피해 가는 것 같았다.
◦ 오직 저 영원한 우주음(宇宙音)과 완전한 정지 속을 나는 숨소리 조차 제대로 내지 못하며 걸었다. 헐고 부르튼 발 때문에 그 재의 태반을 맨발로 넘었지만 나는 거의 고통을 느끼지 못했다.
◦ 그만큼 나는 나를 둘러싼 장관(壯觀)에 압도되어 있었다. 고개를 다 내려왔을 때 나는 하마터면 울 뻔 하였다. 환희, 이 환희는 아무도 이해할 수 없으리라. 나는 아름다움의 실체를 보았다. 미학자들이 무어라고 말하든 나는 그것을 감지한 것이 아니라 인식하였다. 아름다움은 모든 가치의 출발이며, 끝이었고, 모든 개념의 집체인 동시에 절대적 공허였다. 아름다워서 진실할 수 있고 진실하여 아름다울 수 있다. 아름다워서 선할 수 있고 선해서 아름다울 수 있다. 아름다워서 성스러울 수 있고 성스러워서 아름다울 수 있다……
◦ 그러나 아름다움은 스스로는 아무것도 갖고 있지 않다. 그러면서도 모든 가치를 향해 열려 있고, 모든 개념을 부여하고 수용할 수 있는 것. 거기에 아름다움의 위대성이 있다― 이번의 출발은 오직 이 순간을 위해 있었다.
대진 3리의 뒷산에 있으며, 옛날에 절이 있던 자리라 하여 붙은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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